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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29. 2024

남겨진 자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학대 및 가정폭력을 일삼은 아버지의 자살을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라 표현하는 것에 동감을 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정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애정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나의 이런 복잡다단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교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해 큰 혼란을 겪었다.


 아마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내가 대학 졸업할 때 완전히 술을 끊고 그 이후 잠깐 술을 입에 대신 적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 돌아가실 때 까지 가족에게 미안한 감정을 갚으려 더 이상 술을 입에 대지 않으셨덧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말로만 듣던 공황장애가 와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의사 선생님께 평생 나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홀가분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때로는 사랑을 주웠던 사람이자 부모님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선생님은 이것을 양가적 감정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렇다.

 내게 사랑을 주웠던 분이기도 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더 많지만 좋았던 기억도 있는 남이 아닌 피가 섞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였다.


 나를 미워하셨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내게 의지하려고 했던 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보다 약한 존재였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돌아가셨을 때 그토록 꿈꿨던 내면을 얻지 않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날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가 되게 만든 존재가 사라지니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 없이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집안 분위기가 훈훈하고 따뜻할 것 같았지만 마치 나간 집구석 같이 고요했고 쓸쓸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엄마와 남동생은 그동안 아빠 장례로 인해 문 닫아 놓았던 매장을 열기 위해서 나갔다.

 나만 집에 남아 있었다.


 장례식 전에 그 동안 잡혀있는 강의들을 취소한 상태였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힘든 시간에 나를 지탱해 주었던 강의를 놓지 않았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될지 몰라 강의를 취소한 것이다.

 온 집에 아빠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아빠는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을 액자에 넘어 거실에 다 걸어 놓고는 하셨다.

 거실 한 가운데에 서서 둘러보았다.

 가족사진, 내 대학 졸업 및 대학원 때 찍은 사진, 학위기, 내 사진과 남동생의 사진, 중, 고등학교 학업 표창장 등이 걸려 있었다.

 혼자 집에 남겨진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끔찍하게 싫었다.

 원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로 괴로웠다. 그리고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안방을 보지 못 했고 들어 갈 수도 없었다.

 엄마와 남동생에게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싫고 내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말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엄마와 남동생도 힘들텐데 나까지 신경 쓰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내 심리상태는 갑작스럽게 미칠 것처럼 불안감이 엄습해 왔고 그럴 때 마다 스스로 통제 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심장이 두근 두근 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 한 느낌도 들고 답답한 느낌도 있었다.

 이럴 때 마다 호흡이 가빠지는 과호흡 증상이 나타났고 숨이 막히는 듯 한 느낌이 들면서 죽을 거 같았다.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워낙 발이 넓은 분이시라 지인들이 많이 와서 위로 해 주었고 그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느끼지 못 하시는 것 같았다.

 근데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아빠 없는 빈자리를 느끼고 싶지 않다며 식탁 의자가 4개였는데 의자 한 개를 빼서 베란다 창고에 넣어 놨다.


 그리고 엄마는 요즘 아빠가 꿈에 계속 보이는데 깨끗하고 좋은 모습이 아니라 자꾸 안 좋은 모습으로 꿈에 나타난다며 한이 많아서 좋은 곳으로 못 간 거 같다고 하셨다.

 항상 엄마 앞에서는 내 감정을 숨기고 씩씩하게 굴었듯이 내 상태가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엄마를 위로해 드리고는 했다.

 엄마는 우실 때 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일찍 갈 거 였으면 왜 이렇게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냐면서 내 설움 때문에 눈물이 난다고 했다.

 누가 장례식장에서 말하기를 

 ‘너가 받는 상처도 어마어마 하겠지만 너에게는 아빠지만 엄마에게는 남편이었으니까 엄마를 잘 보살펴야 해’ 라고 말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는 나한테 아직까지 정신 못 차렸냐고 하면서 눈물을 그치라고 냉정하게 말하던 엄마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그리고 안방에서 주무시지 않고 거실에서 주무셨다.

 엄마는 남편 없이 혼자가 된 옛말로 과부가 되어 버린 것에도 복잡하게 여러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당신의 신세가 서럽게 느껴진다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짐을 엄마한테 맡기고 떠난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다.

 난 엄마가 우실 때 마다 눈물을 꾹 참으며 엄마를 위로했다.


 옆에서 엄마를 잡아 줄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엄마가 집에 있는 분이 아니라 직업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일을 하는 그 시간만큼은 아빠를 잊을 수 있어서 나처럼 불안감을 느낀다거나 가슴의 통증을 느끼는 등 신체적 이상은 없었다.

 동생 또한 나에게 그렇게 살아 있는 동안 아빠가 누나를 때렸는데 왜 계속 눈물을 흘리냐고 야단을 친 사람이었다.


 근데 동생은 이제 자신이 가장이 되었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고 아빠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도 느끼는 듯 했다.

 아빠와 남동생은 평소에 말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일부러 아빠가 먼저 말을 걸어도 동생은 아빠와 대화 없이 지냈었다.

 아빠에 대한 원망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랬던 동생인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느 날 부터인가 술 

마시고 들어올 때면 집에 술을 사들고 오는 버릇이 생겼다.

 그럴 때면 원래 술을 잘 못하는 엄마와 나였지만 세 사람이 식탁에 둘러 앉아 독한 소주를 몇 잔 마시고는 했다.


 소주보다 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기에 예전과 달리 소주가 그렇게 쓰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남동생이 말하기를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 자전거를 한 3시간 정도 오랫동안 타고 오는 이유가 아빠에 대한 생각으로 힘들어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전거를 탄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아빠가 마지막에 자기 이름을 부른 게 하루 종일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때가 있다며 그게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남동생이 멀쩡하다고 느꼈는데 술을 마시고 진심을 말하면서 나 못지 않게 힘들어한다는 것을 생각하니까 가족 중 한 사람이 자연사가 아닌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은 가족 들은 죄책감까지 느끼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선택은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 말아야 하며 남은 가족 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충격적인 일로 기억되고 오랜 기간 동안 고통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을 가슴에 세기며 그런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빠를 많이 따르고 매일 아빠와 산책을 했던 곰돌이는 아빠를 기다리는 건지 비워있는 안방 침대에 누워 있는 등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때 마다 곰돌이를 껴안고 

 ‘이제 아빠 아예 못 와. 그러니 곰돌이 안방에서 기다리지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아빠가 왜 오지 않는지 궁금하지?‘ 라고


 말하며 곰돌이를 품에 안고 흐느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49제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아빠는 식사 후에 커피를 드실 때마다 커피를 좋아하는 곰돌이에게 뜨거워서 데일까봐 커피를 식혀서는 곰돌이에게 주고는 했다.

 곰돌이는 49일 동안 커피를 못 마셨다.

 나와 엄마는 커피가 몸에 받지 않아서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곰돌이를 위해 내가 커피를 타서 줄 까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아빠가 더 생각날 것 같았다.


 근데 제사가 있는 날 아빠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것들을 상 위에 올려 놓았는데 커피를 제사상에 올려 놓자 곰돌이는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자기한테 커피를 달라고 짖는데 마음이 찡했다.

 곰돌이에게 커피를 챙겨 주웠던 아저씨는 이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정 사진을 꺼내서 상에 올려놓았더니 마치 곰돌이가 뭘 아는 건지 몰라도 짖다가 조용해졌다. 

 그걸 보는데 눈물이 났다.


 절을 하면서 엄마와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생은 애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어 하고 있었다.

 옛날에 가게 화장실에 고장 난 것이 있었는데 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서 아빠가 와서 직접 고치고 가신 적이 있었다.

 근데 이제는 고칠 사람이 없어 기술자를 불러다 고쳤야 했다.

 우리는 이렇게 아빠가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일상 속에서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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