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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26. 2024

아버지의 극단적 선택

 아빠는 지병이 너무 많으셨다. 

 심장판막증 및 부정맥, 만성폐쇄성폐질환, 당뇨, 정신과 등 아픈 곳이 너무 많았고 하루에 먹는 약도 수 십 알 이었다.

 아빠는 당신께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사람이 무언가 집중 하는 것이 있어야 잡생각도 안 드는데 아빠는 일을 하려고 해도 나이가 65세여서 어디 가서 경비일도 할 수 없는 나이였다.

 아빠는 증세가 더 심해져서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하셨다.


 매일 올라갔던 뒷산에서 목을 맺는데 사람들이 발견해서 119에 신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목 부분을 봤더니 밧줄 자국이 나 있었고 목에서는 쇳소리가 들렸다. 

 또 한 번은 서해대교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리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한다.

 또 집에서도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화장실 문이 잠겨 있어서 혹시 목을 맨 것은 아닌가 싶어서 급하게 보조키를 찾아서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얼굴을 테이프로 칭칭 감아서 물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샴푸, 린스, 세재 등 뚜껑이 열려 있어서 화학약품을 마신 것 아닌가 싶어 119에 신고 했다.

 119가 도착해서 우리 집에 들어오더니 아빠의 심박수와 혈압을 체크했는데 다행이 정상이었고 화학약품을 먹었냐는 질문에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독해서 못 삼켰다고 했다.

 119요원이 아빠에게 병원에 가겠냐는 질문에 안가겠다고 말하며 아빠는 안방 침대에 도로 누웠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당신께서 자살하려고 번개탄 10개를 사다 놓았고 농약도 사다 났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에 축구를 좋아하는 아빠에게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이 있다고 알려 주었고 나는 아빠와 함께 축구 경기를 봤다.

 그날 분위기는 좋았다.

 아빠랑 우리나라가 이길 것 같냐는 얘기를 하면서 흥미롭게 보았다. 이 때 아빠는 우울증 환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아빠는 축구경기가 끝나자마자 수제비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수제비를 해 주셨다.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신건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리고 이틀 전에는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커브를 틀다가 오토바이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에 상처가 크게 낫다. 내가 소독하고 후시딘을 발라주며 상처를 보호하고 회복해 주는 큰 밴드를 붙여 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사건이 일어났다.


 전날 밤에 늦게 까지 강의 준비를 해서 새벽에 잠이 들었고 이 날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데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가 봤는데 아빠가 구토를 하고 있었고 거실 싱크대에는 빈 농약 통이 있었다.

 아빠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치면서 계속 구토를 하더니 푹 쓰러지며 안방침대에 누었다.

 난 다급하게 119에 신고했고 아빠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농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고 신고를 해서 그런지 119차가 두 대나 왔다.

 그리고 119요원들은 급한 상황이라 신발을 신은 채 아빠가 있는 안방으로 갔다.

 그러더니 CPR을 하기 시작했다.

 난 너무 놀라서 ‘우리 아빠 심장이 안 뛰어요?’ 라고 물었고 나는 믿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혈관을 잡아 수액을 달았던 것 같다.

 그 때 당시의 기억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구급대 요원들은 CPR을 하다가 근처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했고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도 구급차를 탔고 대학 병원에 도착했다.

 요즘 농약은 옛날과 달리 그렇게 쎄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내가 바로 119에 신고를 해서 CPR중이었기 때문에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 40~50분의 시간이 흘러 간 거 같다.

 얼마 뒤 의사 선생님이 오시더니 최선을 다했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 집에서부터 심정지가 왔고 응급 처치를 했지만 끝내 돌아가셨다며 아빠 모습을 보겠냐고 말씀 하셨다.


 믿기지 않았다.

 아빠를 보기 위해 들어갔는데 상하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마치 잠자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오토바이를 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내가 상처 치료를 해 준 다친 부위를 봤는데 어제 내가 붙여준 밴드가 그대로 붙여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오열을 했다.


 나는 울면서 그 밴드를 내 손으로 떼어 주었다. 내가 상처 덧나지 말라고 치료해 드렸는데 이렇게 가 버리시면 어떻게 하냐고 울부짖었다.

 아직까지도 밴드를 떼어 내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마 이 기억과 아픔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아빠의 볼에 울면서 뽀뽀를 해 드렸다.

 난 소리쳤다.


 아빠를 살리기 위해 11시간에 걸친 심장 수술도 하고 원인 모를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매일 아침 중환자실을 들어가며 오늘은 제발 어제와 다르기를 기도했었다.

 혼수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거의 기적이라며 아빠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퇴원했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모두 아빠를 살리기 위한 시간이었는데 왜 스스로 죽어야만 했냐고 아빠에게 물어봤지만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아빠가 내 방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드냐고 말했던 장면이 계속 아른 거렸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살아 있는 게 고통이었던 아빠는 결국 죽음을 택했다.

 내가 늦잠을 자서 처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 엄마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보통의 일상처럼 아빠가 아침에 일어나서 안방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우리 집 강아지 곰돌이가 반가워서 화장실로 들어오자 아빠는 좋은 말투로 


 ‘아저씨 담배 펴서 담배 연기가 안 좋으니까 저쪽에서 기다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밥을 엄마하고 먹고 커피를 먹는데 곰돌이도 커피를 좋아해서 곰돌이 그릇에 커피를 쏟아 주는 등 일상은 평소처럼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에게 내가 죽을 건데 집에서 죽을까 밖에서 죽을까 라며 말도 안 되는 말을 물어 봐서 맨날 죽는 다는 말을 하는 아빠한테 지쳐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엄마는 안방에 정리 할 게 있어서 안방에 있었다고 한다.


 아빠는 갑자기 나가더니 베란다에서 무엇을 꺼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궁금해서 주방에 서 있는 아빠를 보았는데 이미 농약을 다 들이킨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죽겠다고 농약을 먹었는데 박하사탕을 입에 넣었다고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독극물을 먹고 쓰니까 박하사탕을 먹을 생각을 했을까? 내 생각에 아빠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신 것 같다.

 마치 당신께서는 그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때 나와 남동생이 일어났다.

 나는 아빠가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말았다.

 아빠는 매우 고통스럽게 구역질을 했고 똑바로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침대에 쓰러져서 계속 구역질을 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겨우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은

 ‘아들아’ 였다.

 남동생을 부르고 바로 돌아가셨다.


 아직도 궁금하다.

 왜 동생 이름을 불렀을까?

 119를 불러 달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할 말이 있으셨을까?

 그리고 동생 이름을 부르고 동생에게 전하지 못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난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에 계속 울고 있었다.

 너무 믿기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동생과 엄마는 나에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렇게 맞고도? 맨날 죽는다 죽는다 했고 사는게 힘들다고 한 사람이니까 어떻게 보면 잘 돌아 가신거야. 울지마’ 라고 얘기 했다.

 그리고 자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족 중에 한명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남동생이 경찰서에 가서 평소에 정신과 진료를 받았으나 상태가 안 좋아져서 몇 번 자살 시도도 하셨는데 오늘 아침에 농약을 드시고 돌아가셨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경찰은 우리 집에 와서 주방에 그대로 놓여진 농약병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를 장례식장에 모셨고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먼저 찾아 왔다.

 한동안 친구들이 육아와 일에 전념하느랴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빨리 와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친구들은 잠도 못 자고 장례 치르는 과정이 힘드니 그럴수록 밥 챙겨 먹고 힘내라면서 격려해 주었다.

 지금 장례식 준비 중이라 음식이 준비되지 않아서 어떻게 하냐며 배웅을 해 줬다.

 조문객들이 점점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동안 엄마가 자존심 때문에 친구들이나 친척 등 누구에게도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내가 이혼한 것이 탄로날까 봐 아빠 환갑잔치도 못하고 넘어갔었다.

 엄마는 나보고 네가 이혼했다고 하지 말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사별했다고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 또한 요즘 아무리 이혼을 밥 먹듯이 하고 그게 무슨 흠이 되냐고 하지만 뒤돌아서서 그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아빠의 사망 원인이 자살이 아닌 자연사라고 말하기로 했다.

 워낙 친척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고 뒷말이 무성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굳이 그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이 상주가 되었고 우리는 조문객을 받았다.

 어찌됐든 장례식에 오는 많은 사람들은 아빠의 죽음도 슬픈 일이지만 남편과 사별까지 한 나의 손을 붙들고 어떻게 하냐며 힘내라는 말을 하는 것을 계속 들어야만 했다.

 나의 감쳐진 것이 낱낱이 밝혀지는 잔인한 날이었다.


 사람들은 내 손을 붙잡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날 위로하는 말들을 했는데 그 눈빛과 위로가 너무 싫었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엄마 손을 붙들고 

 ‘아니 사위가 사고로 잘못 됐는데 왜 그걸 얘기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고 있었어...말을 하지 그랬어. 현진이 시집갈 때 현진이가 얼마나 예뻤는데..아휴..어떻게 하면 좋아..아빠보다 현진이가 안 됐네’ 라면서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말하기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우걱우걱 밥을 먹으면서 우리들 얘기를 반찬 삼아 얘기 하는 모습이 역겹게 느껴졌다.


 그냥 아무 말 없이 ‘힘들지’ 하며 한 번 안아주면 끝나는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돌아가셨는지 과정까지 알고 싶어 했다.

 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었다.

 이 방에서 계속 숨어 있고 싶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나를 힘들게 했던 아빠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일들은 생각나지 않고 좋았던 기억만 떠올랐다.

 내가 잔치국수를 좋아했는데 강의를 끝내고 올 때면 잔치국수를 해 주셨다.

 그리고 아들 보다 딸인 나에게 더 의지했고 나와 얘기를 하면 그나마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 아빠였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대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고 종로M스쿨에 다닐 때는 보너스까지 받아서 부모님에게 용돈도 주는 착한 딸이라고 역시 자랑하고 다니셨다. 


 내가 대학원까지 나온 것을 내심 기뻐하시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박사 과정을 하면 교수가 될 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심장 수술 전에 내 곁에 남편도 없는데 아빠가 잘못돼도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수술실로 들어간 아빠였다.

 엄마가 말씀하기를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칭얼거리며 울면서 잠을 자지 않을 때 마다 아빠가 나를 재우고는 했다고 한다.

 아빠가 비록 가정 폭력을 휘두르셨지만 41년 동안 좋았던 기억들도 있었고 술을 끊고 열심히 사시려고 노력하셨다.


  또 이혼으로 인해 외상 스트레스 증후군이 와서 갑상선 기능 저하증과 무월경으로 인해 내분비 내과를 다니고 고질병이었던 두통이 매우 심해져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닐 때 아빠가 말씀하시기를

 ‘돈 몇천만원이 든다고 해도 아빠가 장기를 팔아서라도 고칠 수만 있다면 고쳐줄게’ 라고 말씀하셨을 때 남편은 중간에 나를 버리고 말았지만 아빠가 나를 괴롭히기는 했어도 아빠는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 

 야속한 하늘은 아빠마저 나에게서 빼앗아 갔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근데 친척 언니가 나를 급하게 깨워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얼른 일어났는데 네 남편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죽었다고!’ 이 말을 하면서 그 방에서 나와 버렸다.

 사람들은 잔혹할 때가 있다.

 조심스럽게 물어본다고 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뒷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당사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아픈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가십거리가 된다.

 지금은 아빠를 추모하는 자리인데 몇 년 전 일을 들추기 위해 방에서 자고 있는 상주를 깨워서 물어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인가 싶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좋은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타인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평소에 연락도 없던 친구들이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득달같이 전화해서 전해 들은 그 소식에 대해 낱낱이 알고 싶어 한다.


 장례지도사가 찾아와서 염을 하고 입관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독극물로 돌아가셔서 염을 하는데 모든 구멍에서 이물질이 나온다며 염을 하고 입관하는 것을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집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본 것 만으로도 충격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 모습까지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조문객이 오지 않는 새벽에 국화꽃을 올려 놓고 아빠의 영정 사진을 봐라 보았다.

 멋있게 정장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찍은 사진이다.


 멍하니 계속 보고 있었다.

 저렇게 웃고 있었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세상을 떴을까 싶다.

 그나마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이제 편안한지 묻고 싶은데 어떻게 물어 봐야 하는지...

 만약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여러 가지 생각으로 하염없이 그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마지막 발인 날 나는 아빠 영정 사진을 들었고 동생과 동생 친구들이 운구했다. 

 아빠가 화장터에 왔을 때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나는 계속해서 아빠에게 왜 그랬냐며 이제는 아빠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냐며 울부짖었다.

 내가 너무 우니까 이모들이 나를 달래주었다.

 3일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은 것도 별로 없었다.

 여기 저기서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곡 소리가 들렸다.


 100세 시대인데 아빠는 64세에 스스로 삶을 끝내셨다. 

 너무 이른 나이에 내 곁을 떠나셨다.

 아빠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가루만 남아 봉안 용기에 담겨 있었다.

 아직까지 따뜻해서 마치 아빠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봉안당에 모시는데 답답한 걸 싫어 하실까봐 걱정 했다.


 장례식 내내 막내 이모부가 큰 일을 맡아 주시고 일 처리를 다 해 주셨다.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고 우리 세 가족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네 가족이 아니라 우리는 세 가족으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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