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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26. 2024

극과 극의 대결

 30대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에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극과 극의 대결이었다.

 좋은 일은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진 것과 대학원 진학이었고 나쁜 일은 남편의 외도와 이혼, 그리고 이혼 후 내게 찾아 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것과 아빠의 건강 문제이다.


 나쁜 일은 계속해서 내 인생을 침범했다.

 원래 난 서른 살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었다. 

 어렸을 때부터 서른 살 되기 전 까지 사연 많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서른 이후에는 결혼과 함께 안정된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배신과 이혼으로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 됐고 이혼 후 부터 마치 줄을 서고 기다린 것처럼 나쁜 일들은 차례로 날 잠식시켰다.  


 2012년 34살에 이혼한 나는 내 인생에서 완벽히 그리고 완전히 전남편을 지우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약 4년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을까 싶다.

 처음에는 그리움으로 미련을 갖고 나중에는 원망, 복수심, 분노의 감정으로 힘들었다.

 30대의 반을 그런 감정으로 살았던 것이 후회할 정도로 너무 아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대학원을 졸업할 때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때는 이혼한지 얼마 후였고 하루 하루가 너무 괴롭고 마치 하루가 열흘같이 느껴질 정도로 살아내는 것도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도 대학원 졸업식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내고 애써 웃는 얼굴로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고 싶었고 동생에게는 자랑스러운 누나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날 사진을 굉장히 많이 찍었다.

 나의 석사모를 가족들이 번갈아 쓰면서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현상해서 액자로도 만들고 가족 앨범에도 넣어두자고 하셨다.

 그리고 아빠는 대학원 졸업식 때 찍었던 가족사진을 더 확대해서 나의 대학 졸업식 가족사진 옆에 걸어두셨다.

 또 나의 대학원 석사 학위기를 액자에 넣어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으셨다.

 내가 흔들리면 가족 전체가 흔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날라 가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학대로 인한 압박감을 느꼈다면 지금은 가족을 위한 버티기로 인해 또 나를 짓누르며 살아야 했다.

 엄마가 사실 나를 갖기 전에 혼전임신을 했는데 5개월 정도 됐을 때 배가 너무 아프고 진통이 와서 단순히 배가 아파서 그런 줄 알고 시골 화장실에 가서 힘을 줬는데 무엇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 알고 봤더니 유산이 된 것이다.  

 만약 그 아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나는 장녀가 되지 않았을 텐데 라고 속으로 생각 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로 태어나 장녀로서의 삶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남동생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동생에게는 엄마의 역할도 해야 했다.

 우리 집에 무슨 일이 닥칠 때 마다 난 태연한 척 아무 것도 아니라며 씩씩하게 말하며 엄마를 보살피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걸 짊어지고 계속 앞장서야 하는 벅찬 삶이었다.  

 아빠의 심장 수술비와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동안 병원비만 몇천만원이 나왔다. 불행하게도 실비 보험이 없었다. 실비 보험에 들려고 할 때 아빠가 이미 그 전에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던 때라 보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남자들은 보통 이혼하고 나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지만 여자들은 전문직이 아니면 경력 단절과 나이로 인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서 막일을 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여성들도 꽤 많다.

 나 또한 평생 강사 활동을 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돈을 아끼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부모님 노후 대책도 해 놔야 하고 나의 노후 대책도 해야 하는데 그 돈을 언제 다 모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런 생각까지 해 봤다.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나시고 나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남편과 자식 없이 노후 대책을 하지 못하고 돌봐주는 이가 없어 어쩌면 고독사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강의도 성수기가 있고 비수기가 있다.

 또한 매달 강의 횟수가 틀리고 강의료도 다르기 때문에 스타 강사가 아닌 이상 매달 강의

료가 일정하지 않다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었다.


 특히 이혼을 하고 경제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나에게는 더 큰 고민 거리였

다.

 강사는 외로운 직업이다. 항상 선택 받아야 하며 강의 후에는 강사 평가가 이루어진다. 그

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강사로서의 수명은 짧아진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강사 업계가 옛날 같지 않다고 느껴졌다. 

 여기 저기 학원이 생기면서 강사는 늘어나고 있는데 계속되는 경기침체가 큰 원인이었고 또한 직원교육효과가 미비해서 직원을 위한 투자로 교육을 기획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직원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가 잘되어 있다 보니 기업에서 의뢰하는 강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공공기관 및 행정기관 및 각종 센터에서 정기적으로 있는 교육이 그나마 안정적인 수입이었는데 국가에서 강사료 예산을 줄이기 위해 그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직접 강의를 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물론 유명한 강사 분들에게는 강의 의뢰가 꾸준히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강사들의 밥그릇 싸움은 치열했다.

 엄마는 오래된 가게를 청산하려고 가게를 내놨다. 권리금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으로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건물주가 통보를 해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 가게와 옆 가게를 터서 확장을 시킬 것이고 자기 아들에게 편의점을 차려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달 안에 가게를 비워달라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나는 상황에 놓였다.

 엄마는 다만 권리금 천만원이라도 받고 싶으셨는데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날 때 너무 서러워서 혼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엄마가 말씀하기를 그래도 이 자리에서 장사해서 나 대학 가르치고 생활비도 벌면서 먹고 살았던 터전인데 돈도 돈이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쫓겨나는 것이 너무 비참했다고 한다.

 아빠는 아픈 곳이 많아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엄마도 한 순간에 실직을 하셨다. 나와 남동생이 가계 경제를 책임져야 할 상황이였다.

 어느 날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 이웃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고 서로 인사를 하며 지냈던 분이셨는데 항상 먼저 살갑게 인사와 안부를 묻는 내게 칭찬을 해 주셨다.


 그러면서 나의 직업을 물어봐도 되냐는 말씀에 지금은 강의를 하러 다니고 있고 20대 때는 수학 학원 강사로 일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 분이 늦둥이로 태어난 아들을 너무 오냐 오냐 하면서 키워서 그런지 주의가 산만하고 아무리 학원을 보내도 수학 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차라리 1:1 과외가 효과적일 것 같다면서 내게 과외를 할 생각은 없냐고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으나 이미 교육계를 떠나서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내게 기회를 주신 건 같아 감사했다.

 강의가 맨날 있는 것이 아니고 과외 스케쥴은 얼마 정도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과외비를 적게 받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 친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집중력이 좀 떨어지는 아이였지만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서 실시하는 주간 수학 테스트 점수가 올라갔고 내신도 좋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내신도 중요하지만 창의력 학습도 부탁하셔서 이왕 하는 거 뭔가 가시적인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리 어렵지 않은 수학 경시 대회 준비도 같이 병행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 첫 수학 경시 대회에서 100점 만점에 80점이 넘어 은상을 받았다.

 어머님이 감사의 의미로 우리 집에 포도 한 박스를 배달시켜 주셨다.

 그리고 주변 어머니들에게 내 얘기를 해 주셨고 역시 입소문이 제일 빠른 마케팅이라 몇 명의 학생을 소개받았다.


 나는 그렇게 투잡을 뛰기 시작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아빠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 있어서 오래 걷거나 하면 숨쉬기 힘들었고 당뇨 때문에 발이 저리고 심장도 수술했지만 약간의 부정맥이 있는 상태여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남매에게만 경제적 책임을 떠안겨 주는 것이 싫다며 식당 종업원이라도 할 거 라고 하셨다.

 난 결사반대를 했다. 음식점 종업원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동네 근처 ‘주방 구함’, ‘서빙 구함’ 이라고 써 놓은 곳은 무작정 들어가셔서 주방 직원 면접을 보러 다니셨다.


 어떤 곳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안 되고 어떤 곳은 장사하던 사장님이셨는데 종업원 하기가 막상 쉽지 않을 거라면서 안 된다고 거절당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다니다가 한 곳을 들어갔는데 일주일 전에 면접 봤다가 떨어졌던 곳을 다시 찾아 가셨다. 

 40대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프랜차이즈로 내가 사장님 마음으로 열심히 할 테니까 주방을 한 번 맡겨보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다시 찾아 온 정성을 봐서 같이 잘 해 보자며 기회를 주셨는데 월급 160만원에 4시부터 밤 12시 까지 일하고 한 달에 2번 쉬는 것이 조건이었다.


 너무 장사가 잘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어떻게 일 하고 계신지 궁금해서 음료수를 사 들고 엄마가 일하는 곳을 찾아갔었다.

 여름이었는데 주방에는 벽걸이 에어컨이 없어서 화기에 의해 너무 더웠다.

 그리고 손님이 꽉 차 있는 장사가 아주 잘 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주방에는 엄마 혼자서 일하고 있었다.

 원래는 두 명 정도 일해야 하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엄마는 음식도 해 나가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했다. 메뉴가 밀려서 엄마는 정신없이 음식을 하고 있었고 설거지해야 할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게는 기본적으로 계란찜이 나가는데 뚝배기에 나간 계란찜 설거지가 얼마나 힘든지는 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뚝배기에 눌러 붙은 계란찜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엄마는 수세미로 있는 힘껏 닦아야 했다.

 너무 힘들게 일하고 계신 엄마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평생 쉬지도 못 하시고 아직도 자식들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고 계시는 엄마는 약한 몸이었지만 강한 분이셨다.

 엄마는 지금도 이 때를 생각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너무 힘들게 일 했던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전에는 손등이 괜찮았는데 옛날에 바지락도 캐고 식당에서 마늘이나 양파도 까고 김치도 담그는 등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지금은 손에 모든 힘줄이 튀어나와 있고 손이 많이 상하신 상태이다.


 또 이 시기에 아빠가 환갑이었는데 내가 부모님께 먼저 환갑잔치를 하자고 말씀드렸더니 요즘은 100세 시대이기 때문에 칠순 잔치를 하지 환갑잔치는 안한다고 하셨다.

 나는 아빠가 아픈 곳이 많고 지병이 있는 사람은 환갑잔치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며 계속 하자고 말씀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빠는 내가 일도 못하고 누워 있어서 식구들 고생만 시키는 거 같아 마음이 아픈데 무슨 환갑까지 챙기냐면서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었다.

 부모님 친구분들과 심지어 친척들까지도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환갑을 하면 손님들이 사위를 찾을 것이기 때문에 환갑을 하고 싶지 않은 것 보다 못하고 있다는 점에 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구나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각자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바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큰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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