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출근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중환자실 간호사 옷으로 갈아입고 중환자실에 들어와 물품카운트(중환자실 안 물품이 분실되지 않게 관리하는 것)를 하고 전체인계를 받고 환자인계를 받아서 간호하고 있었다.
수간호사 : 선생님 오늘 부장님께서 오실 건데 갑작스러운 이야기겠지만 선생님을 좋은 곳에 추천해주려고 하세요. 장기이식센터라는 곳인데 나는 선생님이 중환자실에 남아서 일해줬으면 하지만 선생님의 간호사 삶에 좋은 경험이 될 곳이라 있다가 부장님 오시면 이야기 나눠 보세요.
중환자실이 좋았다. 이유 없이 그냥 좋았다. 중환자실 간호사인 내가 그냥 좋았고 환자를 간호하며 보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서이동이라니? 장기이식이라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곳에서 간호사로 내가 일을 하게 되는 건가?
간호부장 : 선생님 장기이식센터로 배치하려고 해요. 선생님께서 보여준 중환자실에서의 역량을 생각했을 때 전문적인 부서에서 더 큰 역량을 펼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혼란스러웠다.
쓰면서도 역설적인 이 말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중환자실 간호사는 좋았지만 중환자실 간호사 환경은 좋지 않았다. 단순히 말하면 3교대가 좋지는 않았다. 5년간의 야간업무는 불규칙한 수면과 식습관을 만들었고 몸이 좋지 않게 느껴졌다. 장기이식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일단 상근직으로 일하는 곳이고 특히 전문적인 일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결심했다. 이 결심은 간호사 입사 후 중환자실을 1 지망으로 적었던 것보다 더 단순했다.
그렇게 나는 장기이식코디네이터가 되었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는 장기기증과 장기이식 전반에 일어나는 여러 과정에서의 코디네이션을 하는 역할을 말한다.
장기이식코디네이터 1년 차, 장기기증 환자를 간호했다. 현재 한국에서의 장기기증은 뇌 전체가 손상이 되어 뇌사 판정을 받은 환자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다. 고귀한 일인 것에 반해 장기기증자 가족들에게는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다. 뇌 전체가 손상된다는 것은 대부분 불의의 사고로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로 인한 뇌손상, 질식으로 인한 뇌손상이 제일 흔하다. 그렇기에 그런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가족이 환자의 뜻을 추측해서 장기기증을 결정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아니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 길목에 장기이식코디네이터는 가족들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정보를 주고 동의를 받는 일을 한다. 쓰다 보니 건조한 글이 되었다. 깊게 이야기를 쓰려하면 끝없기에 여기서 장기기증 업무를 하는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여기서 줄여야겠다. 그렇게 나는 1년 동안 장기기증 업무를 하면서 정말 많은 기증자들의 사연, 가족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다.
장기이식코디네이터 2년 차, 간이식과 신장이식 대기자를 관리했다. 간이식의 경우 혈액검사에서 간기능을 나타내는 수치들을 계산해서 제일 안 좋은 상태를 의미하는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1순위로 이식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1순위는 내일의 1순위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하루 만에 간기능이 확연하게 좋아질 리 만무하다. 보통 전국에서 1순위가 되면 그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채 고용량의 약물치료를 하고 있으며 점차 다른 장기들의 손상들이 진행되고 있는 환자이다. 말 그대로 중환자이다. 2순위라고 3순위라고 상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가족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빨리 가족을 구원해 줄 기증자가 내 가족에게 매칭되기만을 기다린다. 매일 아침 간이식 대기자들의 검사결과를 확인해서 1점이라도 높은 점수가 되면 빨리 이식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기관에 점수를 등록했다. 그러면서 바란다. 내가 점수를 등록한 이 환자가 이식을 빨리 받을 수 있기를.
신장이식의 경우 신장이 망가져 투석을 해야 하는 만성신부전 환자들이 대기자 등록을 하고 대기기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신장이식의 우선순위가 된다. 안타깝게 한국은 장기기증률이 높지 않아 보통 6~7년 대기해야 신장이식을 받을 수 있다. 투석을 받는다는 건 신체적으로도 힘들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힘들다. 투석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격일로 투석을 받아야 한다. 격일로 투석을 받는 게 힘들까? 싶지만 한국의 회사들 중에 격일로 투석을 받으러 가야 하는 사람을 직원으로 둘 리 만무하다. 여행을 가려고 해도 하루 만에 와야 하고 멀리 가면 그 지역의 투석병원에 미리 의뢰하여 투석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건 그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닌 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봤던 40대 남자는 아들과 해외여행 가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얘기했다.
장기이식센터 상담실에는 휴지가 마를 날이 없었다. 애타는 심정에 코디네이터를 찾아와 울며 위로받는다. 그런데 나는 나도 그냥 울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애타는 그분들의 심정을 알기에.
장기이식코디네이터 3년 차, 신장이식, 심장이식 환자들의 코디네이터로 살았다. 이식을 한다고 해서 그분들의 삶이 정상인과 같아지지는 못한다. 이식을 받게 되면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한다. 그로 인해 면역억제제로 인한 면역력 저하로 단순한 감기도 그분들은 크게 앓을 수 있다. 면역억제제는 그분들에게 생명약이다. 면역억제제 복용을 못하게 되면 이식받은 장기가 이식자의 몸에서 ‘내 거 아닌데? 이물질이 들어왔네 면역세포를 가동해서 공격하자’ 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을 거부반응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거부반응이 오게 되면 이식 장기를 잃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이식자에서 이식대기자가 될 수 있다. 양날의 검과 같다. 이식 장기가 내 몸에서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잘 살아가야 한다. 말로 풀어써도 어려운 이 일을 이식자들이 해나가며 살아가는 중에 코디네이터는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전화기는 쉴새가 없다. 선생님 저 기침을 하는데 괜찮을까요? 선생님 저 임신을 했는데 괜찮을까요? 선생님 저 몸에 뭐가 났는데 괜찮을까요?
그런데 겨우 장기이식에 대한 경험을 3년 겪은 나는 물음표에 물음표를 만들어 끝없이 찾았다. 자료와 기록과 연구들을. 그것들이 나를 장기이식코디네이터로 성장하게 했다.
장기이식코디네이터 4년 차, 신장이식, 심장이식 전 후 간호를 함과 동시에 또 다른 역할이 부여됐다. 맞선임 간호사가 됐다. 정확히는 장기이식코디네이터 2년 차 때부터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내 일을 해나가기에 벅차 맞선임에 대해 별로 생각 없이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어야 했나? 아니 그때로 돌아가도 그렇게 지나왔을 거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