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동네를 따라 형성된 뉴욕 미술의 중심지
뉴욕대학교 캠퍼스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웨스트 빌리지 (West Village)라는 동네가 나오고요, 그 북쪽으로는 미트패킹 구역 (Meat Packing District)과 첼시 (Chelsea)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겉에서 보면 사뭇 다른 분위기의 동네들이지만 그 동네들을 엮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모두 동성연애자 (게이)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고 동시에 뉴욕 예술의 중심지로 통합니다. 왜 게이 동네가 예술인들을 끌어들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이들이 모두 예술가도 아니고, 또 훌륭한 예술가들이 모두 성소수자인 것도 절대 아닙니다. 여성편력이 심해서 악명을 떨친 남성 예술가들도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이 두 집단 간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을 못할 것입니다.
웨스트 빌리지는 옛날 우리나라 교과서에 소개되던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서 19세기에 세워진 벽돌로 된 건물이 가득 있는 동네입니다. 하우스턴 스트리트 (Houston Street) 북쪽에 위치하는 길은 거의 대부분 번호로 매겨져 있지만 웨스트 빌리지는 예외입니다. 블리커 스트리트 (Bleecker Street),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Christopher Street) 등등, 이곳의 길은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고, 일부 지역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습니다.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에 작고 귀엽게 생긴 레스토랑, 술집, 그리고 가게들이 위치하고 있지요. 옛날 건물들이라 엘리베이터가 없고 계단이 많아 노인보다는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제가 삼십 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웨스트 빌리지에 와서는 많이 놀라곤 했습니다. 웨스트 빌리지 중심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에 여행사를 광고하는 빌보드가 있었는데요, 두 건장한 젊은 남성이 열대의 바닷가에서 수영복만 입고 서로 포옹하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이곳이 게이 (동성연애자)들의 중심지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빌보드였습니다. 그 위치가 게이들의 중심지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게이인 사람이 미국 작은 마을에서 자라났다고 생각해 보지요. 그런 동네에서는 아주머니들이 매일 찻집에 모여서 마을에 도는 소문들을 공유합니다.
"누구네 집 아들 있지? 걔 여자친구가 없잖아. 글쎄 그녀석이 게이래. 그 부모는 멀쩡한 사람인데, 이를 어쩌면 좋아..."
이웃들끼리 수군거리는 얘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 불화가 심해지면서 아들은 그 마을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익명성이 통하는 대도시로 향합니다. 대도시 중의 대도시 뉴욕이 이런 이들에게 매력적인 행선지입니다. 물론 1977년 이전에는 뉴욕에서도 동성애가 불법이었고 이곳에도 이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서 옛날에는 여기서도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의 밀도가 조금 높던 웨스트 빌리지에 성 수소자들이 더 많이 모이게 됐어요. 이들을 주 고객으로 영업을 하던 술집이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근처에 있던 스토운월 (Stonewall) 여관이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 아주 우연히 이곳이 게이 인권운동의 진앙지가 됐습니다. 그 당시 그 술집 주인은 경찰에 뇌물을 주어 가며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가끔씩 경찰들이 게이들을 단속한다고 나오곤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쌍욕을 하며 단속하는 경찰에게 그 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받는 것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집기와 병을 던지며 저항을 했습니다. 그리고 증원된 경찰들과 밤새 동네에서 싸웠습니다. 이 동네의 길이 미로형이라 경찰이 시위대를 제압 못 했고요. 그날 이후 뉴욕의 성소수자들은 자신들도 인권이 있다며 연례 시가행진을 해 왔습니다. 게이 퍼레이드를 하는 날에는 남장을 한 여자, 여장을 한 남자, 보통 사람들 눈에는 익숙하지 않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길을 가득 매웁니다. 그 맨 앞에서 북을 치며 깃발을 들고 덩실덩실 춤추며 행진을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춤 실력은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분명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는 안무가, 아니면 메트로폴레탄 발레 단원 무용수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시가행진이 50년 이상 계속되면서 이들을 바라보는 뉴욕 사회의 시선도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성소수자들이 주장해 온 것이 “난 원래 태생적으로 이렇게 태어났는데 어쩌란 말이냐”입니다. 이를 축약해서 "위 워 본 디스 웨이 (We were born this way)"라는 구호를 만들었습니다. 1969년까지는 미국 전역에 동성애 금지법이 있었는데요, 게이 인권 운동이 효과를 발휘해서 뉴욕에서는 1977년에 이 법이 폐기됐습니다. 그 이후에도 동성애 금지법에 대한 위헌 소송이 제기돼서 2003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까지 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만약 누가 사회의 규범을 해치는 나쁜 행동을 고의로 저질렀다면 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변할 수 없는 (immutable) 타고난 천성을 기반으로 행동을 한 것이라면 이를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동성애 금지법에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죠. 게이들을 적극 옹호한 연예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레이디 가가 (Lady Gaga)인데요, 이 가수가 2011년에 다음과 같은 곡을 발표했습니다.
“베이비 아이 워스 본 디스 웨이이이이이이~ (Baby I was born this way~: 난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
레이디 가가의 <본 디스 웨이>는 빌보드 차트에 6주 동안이나 1위에 머무르는 기염을 토했고, 레이디 가가의 대표적인 히트곡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 대법원 법리 다툼의 논거를 유행가 가사로 만들어서 히트 친 경우로는 이 곡이 전무후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성소수자 인권 증진에 기념비적 역할을 한 장소라 해서 스토운월 여관을 포함하는 인근 지역을 역사적 기념공간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모두가 성소수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남부 지역의 공화당이 우세한 주에서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지나치게 나갔다는 의견이 다수인 듯합니다. 뉴욕에서도 1980년대까지 이탈리아계 청년들이 게이들을 때려잡겠다며 야구 방망이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게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치안의 부재와 거리의 폭력입니다. 세월이 지나며 뉴욕 시민들은 거리의 폭력보다는 평화로운 공존을 더 지지하게 됐습니다.
게이들이 예술인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지, 아니면 그 역으로, 예술이 번성하는 동네에 성소수자들이 모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게이 동네에는 건축 및 예술도 같이 번창합니다. 그러니 웨스트 빌리지가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하지만 동네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돈 많은 보통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러면서 집값이 올라갔습니다. 소호에서 예술가들이 사라진 것처럼 웨스트 빌리지도 가난한 게이들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죠. 이들이 1990년대 후반 새로이 몰려간 동네가 웨스트 빌리지 북쪽에 위치한 미트패킹 구역 (Meat Packing District)입니다. 맨해튼의 14가 인근 허드슨강변에 위치한 동네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고기를 가공하는 업소 및 그 저장시설이 밀집해 있던 곳이죠. 19세기에 만들어진 기찻길을 통해서 소와 돼지를 운반해 오면, 이곳 도살장에서 이를 처리하고 가공해서 뉴욕 전역에 팔았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 냉동 운송 기법이 발전하고, 또 슈퍼마켓 체인들이 번창하면서 고기를 가공하던 사업체들이 점차 망하기 시작했고 동네가 험해졌습니다. 도시 공동화와 맞물려 마약거래와 불법 윤락업이 한때 번성하기도 했지요. 제가 아는 그리스계 뉴욕 토박이가 1980년대 이 동네 얘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더군요.
“그리스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뉴욕에서 델리 음식점을 많이 하는 것 아시죠. 저희 삼촌이 옛날에 미트패킹 구역에서 그런 음식점을 했어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요. 제가 거기서 일하면서 처음으로 음식 배달 갔던 기억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맙소사 윤락업소였던 거예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그런 업소들 다 없어졌지요.”
이 동네에서 제 동생이 1990년대 후반 패션 사진작가로 활약을 했었습니다. 동생이 일 하는 스튜디오는 인적도 드물고 삭막한 고기 저장 시설만 가득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문패도 없는 공장 철문 같은 문을 쾅쾅 두드리면 동생이 문을 열어주곤 했지요. 그런데 그 내부는 별천지이더군요. 동생을 고용한 패션사진작가가 그 공간을 화려하게 가꾸어 놓았어요. 그 스튜디오 주인은 대만에서 와서 크게 성공한 사진작가였는데, 역시 게이였습니다. 그곳에 그 당시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사진을 찍으러 왔습니다. 자연히 동생이 전해 주는 뉴욕의 연예계 스타들 얘기를 참 재미있게 듣던 기억이 납니다.
“며칠 전에는 마돈나 사진 찍었는데, 이 사람 성격이 보통이 아니더구만. 간단한 헤드 샷 사진 찍겠다고 왔는데, 우리 실장님이 최고 셀럽이 온다고 흥분해서 막 화려하게 사진을 찍으려고 하다가 탈이 났어. 사진 찍을 대상 머리를 다듬어 주고 화장을 시킨 후 진짜 사진 찍기 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고 보여주는데, 마돈나가 그걸 보더니 막 역정을 내더라고. 간단한 사진 찍으러 왔는데 왜 오버하느냐며 실장님 앞에서 그 사진을 북북 찢어 버리는 거야. 사진 예술가에게 그 같은 모욕적인 행동이 있을 수 없지. 바람에 우리 실장님이 구석에서 막 흐느끼며 울었어. 내가 마돈나 진정시키고 동시에 또 실장님 위로하느라고 조금 고생했지.”
그런데 이 동네가 2000년대를 넘어서며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이 모이다 보니 재능 있는 건축가들이 따라 들어와 고기 저장시설을 멋지게 개조했습니다. 하찮은 고깃간 건물도 리모델링을 하니 놀랍도록 멋있어지더군요. 그 건물들에 멋진 가게 및 레스토랑들이 들어섰습니다. 레스토랑과 술집을 찾아 사람이 몰리게 되자 유명 브랜드 명품점들도 따라 들어왔고요. 근년에 들어선 곳으로 구글 (Google),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전시관도 이곳에 들어섰습니다. 2009년에는 이곳에 스탠더드 호텔이 들어섰는데, 뉴욕의 예술가들이 특히 많이 모이는 곳이 되었어요.
2014년에는 휘트니 박물관 (Whiteny Museum of American Art)이 이 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원래 이 박물관은 뉴욕 예술계를 후원하는 부자들의 주거지역인 어퍼 이스트 사이드 (Upper East Side)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것은 이 동네가 뉴욕 미술계의 중심지로 발전했다는 것을 박물관이 인정한 것입니다. 휘트니 박물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 재벌 가문 출신의 조각가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 (Gertrude Vanderbilt Whitney)가 1930년에 시작한 박물관입니다. 미국 미술가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휘트니 여사는 이들을 위한 전시회 및 후원을 특히 많이 했습니다. 1930년에는 자기가 모은 미국 예술가 작품들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었는데, 미국 예술을 우습게 보던 박물관 측에서 퇴짜를 놨습니다. 그래서 미국 예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미술관을 휘트니 여사가 직접 시작한 것이 휘트니 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에서 2년마다 휘트니 비엔날레를 개최하는데, 젊은 미국 미술가들을 발굴하는 대표적인 장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상시 전시하는 유명한 미국 작가로는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e) 등 역사에 길이 남을 20세기 미국 미술가들이 즐비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 역시 이곳에서 1983년 회고전을 하며 더 유명해졌습니다. 백남준 씨가 주도해서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휘트니 비엔날레를 개최한 적도 있고요, 여기에 영향을 받아 광주 비엔날레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전시하는 미술품도 대단하지만 그 새로이 지은 건물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5층에서 8층 사이에는 미술품이 진열된 실내 공간 옆에 동네를 조망할 수 있는 야외 공간과 이를 연결하는 야외 계단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 동네를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습니다. 스탠더드 호텔도 보이고 여기저기 옥상에 자리 잡은 식당 및 레스토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허드슨강변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이 동네 역시 2000년 이후 크게 좋아졌으니 집값이 크게 뛰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은 또 이사를 나가야 했고요. 그중 많은 예술가들이 14가 북쪽에 위치한 첼시 (Chelsea)로 옮겨갔습니다. 원래 가난한 동네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어진 볼품없는 벽돌 건물이 많은 지역입니다. 2024년 현재 수많은 갤러리가 이곳 첼시에 밀집해 있습니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곳이 많은데, 현재 활약하는 살아있는 미국의 예술가들이 이곳 갤러리에서 자신들의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이 동네 일부 지역은 게이 주민들의 비중이 20%가량 된다고 추산하니 꽤 많은 편에 속합니다. 그리고 게이 커뮤니티를 적극 옹호해 온 레이디 가가 (Lady Gaga)가 최근까지 이 동네에 살았습니다.
예술가들이 웨스트 빌리지에서 미트 패킹 구역으로, 또 거기서 첼시로 이동해 온 경로를 상징하는 듯 한 길이 있습니다. 옛날에 만든 기찻길 고가도로를 개조해서 만든 하이라인 (Highline)이 이제 뉴욕의 명소로 관광객의 관심을 끕니다. 휘트니 박물관에서 시작해서 첼시를 통과해서 30가 미드 타운 (Midtown)에서 끝나는 길입니다. 옛 철길을 따라 도시 정원을 조성한 것인데요, 꽃과 풀, 그리고 현대적인 조각품으로 멋있게 조경을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철길 양편에는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아파트 건축물들이 들어서며 예술의 중심지 위상을 더욱 배가했습니다.
이들 건물들 중에는 유리로 만들어져 그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초현대적 아파트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집들을 보면 휘트니 박물관에서 자주 회고전을 갖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의 작품들이 연상됩니다. 호퍼가 활동하던 시기가 20세기 초반인데 뉴욕에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던 시기이거든요. 그는 그 시대상을 포착한다고 길 건너 아파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남의 집안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첼시에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 아파트를 설계한 사람들은 혹시 호퍼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또 새로이 지어진 초호화 유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술이 삶에 영향을 주고, 또 삶이 예술에 영향을 준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곳을 정확히 묘사하는 듯 합니다.
예술가들이 밀집한 30가 이남은 오래된 저층의 벽돌 건물들이 많은 반면 하이라인이 끝나는 30가를 건너면 그 북쪽에 현대적인 유리 건물들이 나타납니다. 십여 년 전쯤까지 기차 종착역으로 쓰이던 땅을 개발해서 허드슨 야드 (Hudson Yard)라고 부르는 고층 건물 콤플렉스를 지었거든요. 건물의 아래층은 쇼핑센터와 식당가를 조성해 놨고요, 고층은 사무실 건물 용도로 쓰입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엣지 (The Edge)라고 부르는 전망대가 있는데,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려는 관광객들 사이에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30가 이북으로는 예술가들은 찾아보기 힘들어집니다. 현대적 고층 건물에 입주하기에는 월세가 너무 비싸서일까요? 아니면 오래되고 조금은 꾀죄죄해 보이는 벽돌 건물을 창의적인 예술가 몇명이서 아이디어를 내서 리모델링 하는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어서일까요? 오래된 벽돌 건물이 가득한 동네를 따라 예술가들이 이동해 온 경로가 뉴욕 예술의 역사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