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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돈 Jul 15. 2024

뉴욕대학교와 워싱턴 스퀘어 파크

대학교 커뮤니티와 거리의 공연가들이 뒤섞이는 곳

하우스턴 스트리트 (Houston Street) 이남의 소호 (SoHo)가 명품 쇼핑을 하는 패셔니스타로 가득한 반면, 거기서 길 하나 건너 북쪽의 동네로 가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거기엔 뉴욕대학교 건물들과 기숙사, 그리고 교직원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고요, 젊은 학생들을 상대하는 맥주집과 음식점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자유분방하고 젊은 분위기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오고, 또 거리의 공연가들이 이 동네에 위치한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합니다.


제가 뉴욕대학교 교수로 처음 일을 시작할 즈음 저희 가족은 하우스턴 스트리트 북쪽에 위치한 뉴욕대학교 교직원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저희 큰 아이가 만 2살, 그리고 작은 아이가 생후 3개월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 시절에는 퇴근 후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을 데리고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가면 항상 거리에서 공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간혹 마술사가 와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도우미를 해 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어떤 때는 공연가가 묘기를 보이기 전에 “여기 있는 어린이 여러분 아저씨가 지금 하는 거 집에서 흉내 내면 절대 안 돼, 알았지!” 하며 횃불을 들고 외발 자전거를 타거나, 입에서 화염을 뿜거나, 커다란 칼을 목구멍 아래로 넣는 시늉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와 저희 아이들이 매일 저녁마다 눈이 휘둥그레져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는 뉴욕대학교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공원인데, 학교의 땅이 아니라 뉴욕 시에서 관리하는 부지입니다. 1989년 히트작이었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에서 남녀 주인공이 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하는 곳이 이 공원 북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개선문 축소판처럼 보이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 아치 앞입니다. 그 아치 너머로 공원 한가운데에 멋있는 분수가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과 동네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입니다. 원래는 분수에 못 들어가게 돼 있지만 여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여기서 첨벙첨벙 뛰어놀고는 합니다. 수십 년간 이어온 전통이니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요. 한 번은 분수에서 사람들이 뛰어노는데 노숙자가 분수에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방뇨를 하더군요. 분수에서 뛰어놀던 사람들이 다 기겁을 하고 나왔지요. 그 이후 20분쯤 지났을까요, 자초지종을 모르고 새로이 도착한 사람들이 분수 물에 다시 들어가 놀기 시작하더군요. 


워싱턴 스퀘어 파크 분수대. 그 뒤에 아치가 보입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는 비교적 작은 공원이지만 그 안에서도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구역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공원의 동쪽에는 뉴욕대학교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 여기는 학생과 교직원들이 비교적 많이 있습니다. 공원의 북서쪽으로 가면 학생들은 잘 보이지 않고 허름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마약 거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구역으로 유명한 코너입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경찰이 수십 년간 모른 척하다가 한 때 경찰차를 진주시켜 놓고 마약사범들을 단속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주민들 사이에 불평이 쏟아졌습니다. 전에는 마약 거래하는 사람들이 북서쪽 코너에만 있었는데, 이들을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마약 거래가 공원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는 이유였어요. 민원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제 경찰은 여기에서 철수했고, 마약사범들이 다시 북서쪽 코너로 모였습니다.  


남서쪽 코너는 북서쪽과 바로 지척인데도 불구하고 환경이 좋아 보입니다. 이 코너 근처에 뉴욕대학교 법과대학이 있고, 그 옆에는 고급 아파트 건물들이 있거든요. 1980년대까지 이 법과대학은 그저 그런 학교였는데, 그 이후 크게 성장해서 이제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로스쿨 그룹에 속하게 됐습니다. 이 학교를 이렇게 성장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 마틴 립튼 (Martin Lipton)이라는 변호사입니다. 평범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70년대에 뉴욕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인물인데, 그 당시만 해도 미국 최고의 로펌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 최고의 로펌 하면 19세기에 창립된 곳들이 대부분이고, 유명 법조인의 아들, 손자들이 하버드 및 예일 법대에 특혜 입학 및 졸업 후 많이 일하는 분위기였답니다. 그런 환경에서 립튼은 자신과 비슷한 평범한 유대인 변호사들과 힘을 합해서 왁텔-립튼 (Wachtell-Lipton)이라는 새로운 로펌을 만들었는데, 이 회사가 불과 십여 년 만에 최고로 돈을 많이 버는 로펌이 됐습니다. 고리타분한 법조계에서도 돈을 버는 데 있어서는 집안 배경이나 학벌보다는 일하는 능력이 최고라는 것을 이 회사가 여실히 보여주었지요. 회사 인수 합병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해서 성공을 했는데, 이 분야는 이 사람들이 개척하기 전 까지는 천대받는 분야였대요. 창업자가 열심히 일궈 놓은 기업이 있는데, 자본가 및 투기꾼들이 돈으로 밀어붙이면서 “좋은 말 할 때 회사 넘기라” 며 협박하는 분야를 점잖은 사람들이 좋게 볼 리 없었지요. 상놈 중의 상놈이나 하는 직업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왁텔-립튼에서 인수합병을 하고자 하는 자본가, 또 이들로부터 회사를 지키려는 주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여러 법률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회사를 먹느냐 먹히느냐에 따라 천문학적 금액이 왔다 갔다 하니 이해 당사자들이 돈 아끼지 않고 최고의 변호사에게 큰 자문료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왁텔-립튼이 결국 이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게 되었는데, 미국 로펌 중 파트너당 수익률을 계산하면 지난 20년간 부동의 1위를 지키는 로펌이 왁텔-립튼입니다. 이 로펌이 크게 성공하면서 “인수 합병”을 천한 분야로 무시하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젊고 유능한 변호사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분야가 되었습니다.  


왁텔-립튼 로펌의 창립 멤버 상당수가 뉴욕대학교 로스쿨 출신인데, 이들이 뉴욕대학교 로스쿨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측에서는 그 후원금으로 다른 명문 로스쿨의 스타 교수들을 많이 스카우트했습니다. 하버드 교수 출신들도 다수 이곳으로 이사 왔습니다. 제가 아는 하버드 교수들은 흔히 “학교에서 해 주는 것이라고는 하버드 대학교 로고가 찍힌 명함 사용하게 해 주는 것뿐”이라고 불평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뉴욕대학으로 옮기면 세계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지, 거기서도 모두들 선망하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 인근의 호화 아파트를 학교로부터 저렴한 월세로 제공받습니다. 뉴욕을 좋아하는 학자라면 마음이 안 흔들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뉴욕대학교 의과대학도 인수 합병으로 크게 성장한 케이스입니다. 지금의 의대 학장인 로버트 그로스만 (Robert Grossman)은 2008년부터 의대를 이끌었으니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대의 재정을 크게 호전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 과 교수들을 모아놓고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더군요. 


“병원과 의과대학이 환자들 봐서 돈 버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장이 된 이후 인수 합병으로 눈을 돌렸어요. 뉴욕에 퍼져 있는 개인 병원, 그리고 작은 규모의 종합병원을 (적대적으로) 인수 합병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키우고, 또 그렇게 해서 경비를 절감해 가며 우리 병원과 학교를 성장시킨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뉴욕에는 이제 개인 병원이 거의 다 없어졌더군요. 그중 상당수가 “뉴욕대학병원 외래진단소”로 간판을 갈아 달았습니다. 여기서 뉴욕대학교 나름의 철학이 보입니다. 저희 학교는 상아탑 안에서 이론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교가 아닙니다. 물론 저처럼 이론에 치중한 연구를 하는 교수도 많습니다만 전반적으로는 뉴욕의 상업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도시와 함께 성장해 온 학교입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공원 구석구석 수많은 공연자들이 활동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 피아노맨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약 15년 전쯤부터 매일 나타나기 시작한 사람인데요, 지하철 역에서부터 그 무거운 피아노를 밀고 오는 모습이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매일 산 위로 큰 바위를 밀어 올리기를 반복했다는 시지프를 연상시켰습니다. 공원에 도착해서 이 사람이 하루 종일 연주하는 음악은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과 같은 고전적인 작곡가의 음악부터 시작해서 라흐마니노프 (Rachmaninov), 클로드 데뷔시 (Claude Debussy),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 필립 글라스 (Philip Glass)와 같은 20세기 클래식 작곡가의 작품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특히 여름에 해가 진 이후 시간에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을 즐겼습니다. 공원의 동쪽 편에 울창한 나무들과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연주하는 이 사람의 로맨틱한 피아노 음악, 그리고 그 주변의 반딧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동네 분들과 관광객이 이 주위의 벤치에 앉아서 평화롭게 음악 감상하는 광경이 매일 반복됩니다. 연주자는 꽤 무뚝뚝한 성격인데, 연주 끝나고 사람들이 팁을 줄 때만 “감사합니다”라고 한마디 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연주하기 전에 몇 마디 더 할 때도 있습니다. 


“다음 연주는 필립 글라스가 작곡한 작품입니다. 며칠 전에 이 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필립 글라스 선생님이 여기를 지나가더군요. 그래서 “선생님, 제가 선생님 곡 연주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었더니, 눈길도 안 주면서 “닥치고 계속 쳐” 한 말씀만 하시고 가시더군요. 이제 여러분 앞에서 다시 연주 시작하겠습니다.” 

공원에 매일 피아노를 끌고 와서 연주하는 피아노맨, 콜린 허긴스

그런데 이 피아노 맨을 포함해서 많은 공원의 연주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 기간 동안에 많이 고생을 한 모양입니다. 뉴욕 지역 일간지가 이 사람에 대해 2023년에 기사를 자세히 썼더군요. 제목은 <노숙자가 된 워싱턴 스퀘어 파크 피아노맨>. 기사에 의하면 피아노맨의 이름은 콜린 허긴스 (Colin Huggins)로서 조지아 주의 평범한 가정 출신이랍니다. 그저 피아노란 악기는 극성 부모 및에서 열심히 레슨 받아야 칠 수 있는 것이라고 제가 잘 못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완전 독학으로 피아노를 치게 되었다네요. 이 사람 한참  때는 관객들이 주는 팁으로 버는 하루 수입이 천불쯤 됐었답니다. 그 돈으로 이 동네에서 월세도 구하고, 피아노 역시 최고급 스타인웨이 그랜드로 바꾸었습니다. 이 커다란 피아노를 매일 운반해 주는 업자도 고용했고요. 그러다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닥치고 관광객이 사라지면서 수입이 끊겼고, 월세 집에서도 쫓겨나서 밤에는 피아노 위에서 자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 최고로 괴롭다는 얘기도 전했고요. 한국사람이었으면  조지아의 부모나 친척 집에 잠시 신세 질 만도 한데, 예술가로서 뉴욕에 남겠다는 집념인지, 아니면 우리와는 다른 미국 사람들의 가족 문화 때문인지 노숙자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이제 어려운 시기도 지나고 관광객들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재능 있는 피아노맨도 아마 이제는 더 이상 노숙자가 아닐 것 같습니다. 미국 전역에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지만 시골에서 자라면서 예술과 문화에 관한 집념과 재능이 있는 이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정착한 예술 공연가들 덕에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그렇게 선순환 작용이 계속되며 이곳은 세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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