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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돈 Jul 08. 2024

미술가들이 일으켜 세운 뉴욕의 소호 (SoHo)

공장지대에서 명품점과 갤러리의 거리로 진화하기까지

17세기에 맨해튼 최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뉴욕은 세월이 지나며 그 북쪽으로 계속 시가지를 확장했습니다. 지금의 월가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노라면 도시가 성장해 온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에서 중요한 획을 그은 길이 있습니다. 최남단에서 약 2마일쯤 북쪽에 위치한 하우스턴 스트리트 (Houston Street)입니다. 19세기 들어서 그 길 이북으로 도시가 확장하자 뉴욕시에서 미리 바둑판 형태로 길을 구획하기 시작했고, 길 이름에도 번호를 매겨 붙였습니다. 하우스턴 바로 이북에는 1번가, 그다음엔 2번가, 이렇게 해서 맨해튼 북쪽 끝의 200여가 까지 번호가 올라갑니다. 반면 하우스턴 스트리트 이남은 길 하나하나에 옛 이름이 그대로 있습니다. 프린스 스트리트 (Prince Street), 스프링 스트리트 (Spring Street), 브룸 스트리트 (Broom Street) 등등이 하우스턴 스트리트 이남에 있습니다. 소호 (SoHo)라는 동네는 바로 그 하우스턴 스트리트의 바로 남쪽 (South of Houston Street)에 위치하는 곳입니다. 


소호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명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이곳은 쇼핑의 천국입니다. 건축 양식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독특한 건축물들을 감상하러 이곳에 옵니다. 미술 애호가들은 이 동네의 갤러리를 찾아옵니다. 저는 조금 다른 이유로 이 동네를 좋아합니다. 저희는 하우스턴 스트리트 북쪽, 즉 노호 (North of Houston Street)에 십 년 넘게 살며 아이를 키웠거든요. 저에게 있어서 소호는 아이들을 키울 당시의 옛 추억이 가득한 곳입니다. 


저희 부부는 맞벌이를 하다 보니 그 동네 살 당시에 애를 봐주는 아주머니를 고용했는데요, 그분이 놀이터에서 알게 된 다른 아이들의 집으로 저희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가곤 했습니다. 당시 큰 아이가 만 세 살이었는데요, 이 조그만 아이가 저희도 모르는 인적 네트워크가 있다는 사실을 저녁식사 대화를 하다가 처음 알게 됐어요. 


            “오늘은 누구하고 놀았어?”

            “쥴스”

            “놀이터에서 놀았어?”

            “아니, 쥴스네 집에서.”

            “뭐 하고 놀았는데?”

            “자전거 타고 놀았어.”

            “걔네 집에 마당이 있어?”

            “아니”

            “그럼 어디서 자전거를 타?”

            “마루에서.”

            “뭐? 마루에서 자전거를 타?”

            “응.” 


처음에는 우리 세 살짜리 아이가 꿈과 현실을 구별 못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아이를 데리러 쥴스네 집에 갈 일이 생겼어요. 소호의 대표적인 거리 웨스트 브로드웨이 (West Broaday)에 있는 캐스트 아이언 (cast Iron) 건물에 살고 있더군요. 이름 그대로 뼈대가 주철 (cast iron)로 만들어진 건물인데, 19세기 중후반에 이 같은 건물들이 소호에 많이 들어섰습니다. 이렇게 주철로 건물을 만들면서 건물 모양이 달라졌어요. 그 이전에 세워졌던 벽돌 건물에 비하면 뼈대가 강하기 때문에 그 당시 다른 건물들보다 창문을 아주 크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 내부에 기둥을 촘촘히 둘 필요도 없어졌어요. 쥴스네 가족은 그 건물 3층에 살고 있었는데, 캐스트 아이언 빌딩답게 천장이 아주 높고, 중간에 기둥이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방을 따로 만들어 놓지도 않았고, 그 대신 그 공간 내부에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2층을 만들어 놓고서 이를 침실 공간으로 쓰더군요. 1980년 이후 갑자기 인기가 치솟은 소위 로프트 (loft)라는 주거 공간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마루에서 자전거를 타고 충분히 놀 수 있는 그런 구조였어요.  

쥴스네 가족이 살던 소호의 캐스트 아이언 건물

이러한 캐스트 아이언 건물들은 원래 방직공장으로 쓰려고 지었다고 합니다. 뉴욕에는 전기가 1880년대 들어서 공급됐으니, 그 이전에는 의류를 만드는 공장 주인들이 채광이 잘 되도록 천정을 높게 하고 창문을 크게 만드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공장주들이 기둥이 없는 확 트인 공간을 좋아했지요. 비록 공장 건물이지만 외벽에는 19세기 스타일의 장식 문양들이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뉴욕에 현재 250여 개 캐스트 아이언 빌딩이 있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이 소호에 있습니다.  


이 동네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많이 겪어 왔습니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미국의 섬유 산업이 점점 사양길에 들어서며 동네가 내리막 길을 겪게 됐습니다. 공장들이 망하자 동네가 공동화되며 위험해졌는데, 당시 커다란 캔버스에서 작업하는 것을 선호하는 가난한 화가들이 확 트인 공간과 저렴한 월세를 찾아 이곳으로 많이 이사 왔습니다. 이곳의 건물들은 그 당시 주거공간으로 승인이 안 됐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하는 공간으로만 쓰였는데, 점차 이를 불법 개조해서 주거 공간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쥴스의 아빠도 사진 예술가로서 소호에 이주해서 당시 싼 값으로 폐허가 된 공장 건물을 산 모양입니다. 


이렇게 이 동네에 예술가 인구가 꽤 많아졌을 즈음, 롱 아일랜드와 뉴저지를 잇는 고속도로를 여기에 만들겠다는 계획이 생기면서 동네가 한때 없어질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 동네에 불법으로 주거하던 예술가들이 반대 캠페인을 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결국 고속도로 건설 계획은 취소됐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소호의 캐스트 아이언 빌딩들이 뉴욕의 보존 대상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왔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소호의 브룸 스트리트 (Broom Street)를 가 보시면 이 역사의 부산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캐스트 아이언 빌딩들이 길 양편에 늘어서 있는 길인데요,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없으니 이 길을 통해서 뉴저지를 가는 차량들이 심하게 정체돼 있는 풍경이 매주 벌어집니다.  


미국에서 맞벌이 부부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것 하나 꼽으라 하면 아이들이 중학교 진학할 때까지 어른이 항상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장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초등학교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학교 잘 다니는데 여기는 왜 이러나 하고 불평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소호를 지나가다가 경찰이 한 블록 전체를 막고 무언가 수사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뉴스를 통해서 자초지종을 알게 됐습니다. 1970년대 그곳에 살던 예술가 부부가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처음으로 혼자 학교에 보냈다가 아이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부부가 열심히 캠페인을 해서 “실종된 아이 에탄 파츠(Ethan Patz)를 찾는다”는 문구를 전국의 우유 팩에 찍었어요. 이로 인해 아이들 유괴 문제가 큰 사회 이슈로 부각하면서 그 이후에는 미국에서 초등학생이 혼자 학교 가는 광경이 사라졌습니다. 어른들이 꼭 아이들과 동행해야 하는 사회적 관습이 그때 시작된 것이지요. 30년이 넘게 미제 사건으로 있었는데 범행을 자백한 사람이 그날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 이 동네의 중남미 이민자들이 하는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혼자 학교를 가는 초등학생에게 사이다를 주겠다고 가게로 유인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경찰이 유기했다는 아이의 시체를 찾고 있었어요. 그 피해자의 부모는 아직도 소호의 같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명품점들이 즐비한 이 동네에서 작은 구멍가게들은 자취를 감췄고요.


1970년대 이후 뉴욕의 범죄율이 낮아지고 경제가 발전하며 소호가 다시 인기 있는 동네로 변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창문이 큼직한 빌딩들에 끌려 명품 옷가게들이 이곳에 많이 들어섰습니다. 동네가 좋아지자 쥴스네 아빠는 1층을 명품 이탈리아 옷가게에 월세를 주며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주위의 다른 캐스트 아이언 빌딩에도 루이 뷔통, 랄프 로렌, 티파니, 브루넬로 쿠치넬리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명품점들이 많이 입주했고요. 쥴스 아빠는 나이가 많으셨는데도 새 장가를 가셔서 쥴스를 낳았고 빌딩 위층을 자신들의 주거 공간으로 개조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옛 동네를 다시 찾았습니다. 지난 십 년간 변한 것은 거의 없더군요. 소호의 브로드웨이는 여전히 명품 쇼핑을 하려는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쇼핑에 별 관심이 저는 그다지 매력을 못 느끼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서쪽으로 5분쯤 걸어서 쥴스네 집이 있는 웨스트 브로드웨이로 향했습니다. 예전처럼 미술 갤러리들이 그대로 있었고, 그 앞 도로에는 거리의 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해 팔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가끔씩 담소를 나누며 지내던 거리의 화가는 그날 안 보이더군요. 웨스트 브로드웨이의 서쪽으로 한 블록 더 가서 톰슨 스트리트 (Thompson Street)라는 작은 길이 다다랐습니다. 관광객과 쇼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브로드웨이와는 지척이지만 이 길은 조용합니다. 마치 제가 떠나온 포근한 고향 마을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거기에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던 동네 놀이터가 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 그네를 미는 부모들이 보입니다. 십여 년 전 제 모습이 떠 오르면서 그곳에서 같이 놀던 다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톰슨 스트리트의 어린이 놀이터

예술가들이 다시 살려 놓은 소호인데, 지금은 비싼 동네가 되어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를 찾아보기는 힘들게 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 년 전 저희는 그 동네에서 이사를 나왔습니다. 새 집을 물색하던 중, 소호의 중심인 브룸 스트리트 (Broom Street)에 있는 캐스트 아이언 빌딩의 로프트 아파트가 매물로 나왔길래 구경하러 간 일이 있습니다. 가난했던 예술가 할머니가 40년을 살았던 집이었는데, 밖에서 보면 너무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안에는 귀신이 나올 것 같이 허름하고 무질서했습니다. 부동산 업자가 부르는 가격도 참 높았지만 그 로프트를 수리하려면 또 아주 큰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부동산 업자에게 이 건물에 입주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어봤더니 “이제는 주로 금융계에서 돈 많이 버는 사람들이 살아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희는 결국 다른 동네로 이사했습니다. 의류 방직 공장이 밀집한 지역으로 시작해서 예술가들의 동네로 발전하더니, 이제 소호는 멋진 건물에서 살고자 하는 재력가들의 주거지로 바뀌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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