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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물감각 Feb 29. 2024

프롤로그- 젊은 날의 초상

소라다방 그리고 금정암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우리가 그곳을 떠나던 날, 벌써 봄이 오고 있었다.
그 징후로 얼마 전부터 빼곡히 춘란이 꽃대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춘란이 일제히 꽃 피우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발걸음이 멀어질수록 파도소리에 잠겨가는 암자는 이제 아득한 추억으로 사라질 것임을 예감했다.
금정암은 나의 젊은 시절을 내밀한 무엇인가로 새겨 놓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던 바다와 파도소리는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분출하는 나의 에너지가 되고 진실의 이미지가 되어 주었다.

이야기는 1973년 1월로 돌아간다.
나는 그때 대학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려는 겨울이었다. 형이 가슴 설레는 제안을 했다. 겨울방학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 두 달 정도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오자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왕이면 안 가 본 곳, 아주 먼 곳이면 좋겠다고 우리는 의견을 모았고 그 여행을 문학기행으로 명명했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았지만 군대 갔다 오고 대학을 옮겨 오느라 늦은 나이에 나와 같은 학년으로 수업을 듣는 국문학과 동급생이었다.
형은 그해(1973)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분에서 당선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직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화작가로 이름을 알린 유명 작가가 되었다. 형의 책을 많은 독자들이 사랑했다. 어른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형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2001년 1월 9일 눈이 많이 오던 날 그는 동화처럼 눈을 밟고 갔다. 나는 그때 양평 중미산 휴양림 숲 속에 위치한 아름다운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형의 부고를 받았지만 집 밖에는 눈이 1미터 정도 쌓여있었다. 눈이 무섭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난공불락의 눈 더미 때문에 나는 일주일을 산속에 갇혀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 생애 최고의 적설량을 경험했고 눈의 난폭함에 정신이 없어서 고통스럽게 자동차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어제도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하루종일 눈을 치우면서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나간 형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남겨야겠다고 마음먹고 스마트 폰을 열었다.

정ㆍ채ㆍ봉ㆍ형의 이름은 한자를 떠나서 한글로만 읽으면 채송화와 봉선화가 꽃핀 꽃밭을 연상케 한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동화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던 그의 솜씨는 서점에 가면 늘 확인되곤 했다. 정채봉 코너가 있던 서점의 매대가 그립다.

1973년 1월 초순, 국문과 동기 친구와 나는 여행배낭을 꾸려서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전라도 바닷가에 있는 작은 암자가 우리의 목표였다. 주소지는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계마리 금정암, 당시 서울에서는 가기 쉽지 않은 그야말로 오지에 위치한 한적한 곳이었다.
완행열차로 정읍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벌써 지쳐 있었다.
하지만 버스로 바꿔 타고 법성포를 향해 출발했다.
완행버스라서 여행길이 너무 느리고 길었고 피곤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그때 버스밖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상북도 출신으로 처음 와 보는 고창지방 풍광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완만한 곡선과 평야는 경이로웠고  마을마다 나타나는 수많은 크고 작은 언덕은 누워있는 젊은 여성의 둔덕처럼 소담하게 솔 숲을 드리운 아름답기 그지없는 고결한  풍경이었다.

드디어 우리는 법성포에 도착했다. 목적지까지는 한번 더 버스를 타야 하지만 활기찬 포구의 정경은 우리의  마음을 푸근하게 다독여주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백반을 주문했다. 벽에 붙어있는 메뉴가격은 인당 500원이었다. 그런데 반찬이 무려 30~40가지가 나왔다. 친구와 나는 놀라서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니지, 외지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려 하다니'.
줄곳 이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받아본 전라도 밥상은 놀람 그 자체였다. 밥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안도했다.
마지막 종착지 계마리로 가는 버스는 한 시간 후에나 출발할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소라다방이라는 간판을 보면서 장 콕도의 시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닷소리를 그리워하오'를 떠올렸다.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은 단정해 보이는 레지가 주문받으러 왔다. 나보다  두 살쯤 어려 보이는 아가씨는 예쁘게 커피를 서빙해 주고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탁자를 떠나갔다. 그때 레코드를 통해서 들리는 노래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푸른 등불 아래 붉은 등불 아래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새빨간 드레스 걸쳐 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지며
비 내리는 밤도 눈 내리는 밤도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외로이 들창가에 기대서서
슬픈 추억 속에 남모르게 우는
애달픈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박신자라는 가수가 부른 이 노래는 1968년 가사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은 곡으로 방송되거나 재생되어서는 안 되는 엄격히 금지된 노래였다. 이 노래가 여기서는 아무렇지 않게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이곳은 갈매기가 날고 파도소리가 난무하는 궁벽진 어촌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두 달 동안 기숙할 금정암은 생각보다 훌륭한 전망을 보여주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인자한 대처승 부부가 암자를 운영하고 있었다.
바다 가까이 해발고도 110미터에 위치한 암자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황홀경이었다. 대체 저 바다에서 나는 무엇을 원해야 할까? 하고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파도소리는 평생 함께 지니고 살아가야 할 다정한 질병처럼 무시로 따라다녔다. 낮과 밤도 가리지 않고 세수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시를 읽고 있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떠나는 법이 없었다.

형은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오느라  일주일 후에나 이곳으로 와서 우리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나는 형에게 엽서를 썼다.  

-이런 멋진 곳에서 체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뜁니다. 그러니 기대하고 오셔도 좋습니다.
바다가 형을 즐거이 맞이해 줄 것입니다. 파도소리를 엽서와 함께 보냅니다.

우리는 독서와 글쓰기를 게을리하고 날마다 바닷가를 쏘다녔다. 어느 날은 겨울 폭풍이 덮쳐서 수평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파도가 해안선에서 난파되는 광경을 바위 위에서 하루종일 지켜보기도 했다.
암자에서 바라보면 길게 펼쳐진 해안선이 광활하게 드러나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바다 기슭은 속살을 무시로 보여주는 은밀한 시간을 만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무엇보다 수평선 저 멀리에는 안마도가 황도, 오도, 죽도, 석만도 등 몇 개의 섬들로 구성된 안마군도를 이루며 그리움처럼 점점이 떠있어서 언제나 아늑한 위안이 되었다. 또한 산을 내려가면 가마미해수욕장이 나타났다. 겨울철이라서 황량하지만 구멍가게가 있어서 소주라든가 간식을 살 수 있어서 좋았고 요긴했다.

남도에, 바다보다 넓게 눈이  내리는 날 형은 놀랍게도 여자 셋과 함께 왔다. 그 여자들은 우리들 셋의 각각의 애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서 함께 할 수 있다니 그때 바다는 얼마나 푸르르고 활기찼던가. 여친들과 함께 한 일주일은 즐거웠고 나는 그녀에게 바다를 설명해 주느라 다정하게 바빴다.
 
여자들이 서울로 귀환하는 날이 왔다. 형을 암자에 남겨두고 친구와 나는 법성포로 가서 애인들을 전송했다. 우주선처럼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들은 떠나갔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고 우리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포구에 남았다.

계마리로 향하는 버스를 탔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명동이나 종로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지 결코 이런 궁벽한 시골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여인은 더구나 아니었다. 새련된 미니스커트와 블라우스에 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에 하이힐로 장착한 그녀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은 이곳에서 이런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일까? 몹시 궁금해졌다.
버스가 계마리에 도착하자 그 여자가 우리를 따라 내렸다. 그러더니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숙현 씨죠?"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대화일까. 나는 이곳에서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여행자이자 손님이었다. 이 지역과는 털끝만큼도 연관이 없었다.
그런데 낯선 여인이 내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저는 정채봉 씨 부인입니다."
이 말 때문에 이 극적인 만남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지만 이 한마디 또한 충격이었다. 형이 결혼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방금 전에 우리가 서울로 떠나보낸 애인 말고는 여자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나는 단번에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했다.
"아, 그럼 형수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
"사실은 님이 형에게 보낸 엽서를 보고 여기로 곧장 왔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보자마자 숙현 씨를 직감했습니다. 맞았군요."
우리는 그녀와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지만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까. 이대로 암자에 들어가면 스님 부부가 어떻게 생각할까? 공부하러 온 대학생들이 여자들만 끌어들인다고 욕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형수님을 모시고 우리가 늘 가는 바닷가 바위로 가 있으면 내가 암자에 올라가서 형을 내려보내겠다고. 나는 빠르게 암자로 가서 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형은 놀라긴 했지만 차분한 표정으로 산을 내려갔다.

친구와 나는 침울하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애인이 떠나고 남겨진 바다는 관능을 잃어버린 창부처럼 아무것도 전달해 주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고 거칠게 굴었다. 형의 문제도 걱정이 되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어도 언어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을 거듭했다. 나는 바다가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담배만 줄곳 폈다.
겨울철은 빠르게 밤을 불러온다. 암자가 칠흑 같은 어둠에 파묻혀 고요함을 원했지만 험악해진 바다의 거친 파도소리가 자꾸 훼방을 놓았다. 그때 형은 소주병을 들고 돌아왔다. 우리는 말없이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많이들 놀랐지. 여자는 서울로 가도록 설득해서 버스에 태워 보내고 왔네"
우리는 또 한 잔씩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서 형은 그 여자를 만나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의 군생활은 대대장의 당번병이었다.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기보다는 사택에서 업무를 볼 때가 더 많았다. 주된 임무가 대대장의 초등생 아들을 돌보는 역할이었다. 등하교와 숙제를 봐주고 학업을 관리하는 임무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담임선생님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선생님이 교실에서 홀로 풍금을 치고 있을 때 형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선생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진을 보여 드려도 될까요?"
"아, 내. 보여주세요."
형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사진을 그 선생님에게 내밀었다. 그 사진은 교실 복도에 걸려있던 것으로 그 선생님이 토끼모자를 쓰고 학생들과 함께 찍힌 학예회 사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지만 제대를 하면서 형은 이별을 원했다. 형은 그 여자와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형과 관계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여자는 고민 끝에 마음먹고 형의 거처에 방문했지만 애인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엽서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그 길로 엽서에 쓰인 주소를 들고 먼 길 여행을 감행했다.

-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섬에
파도 자국이 없을 수 없듯이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빗금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저 바위처럼
아린 상처나 덧나지 않게 소금물에 씻으며 살 수밖에요.
    (정채봉의 책 <첫 마음>에서)

바다는 다시 평온해졌다.  심심한 밤이 되면 우리는 게임을 펼치고 지는 사람은 암자 뒤편의 암굴에 무언가를 던져놓고 오기로 규칙을 정했다. 그 암굴 쪽은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야 하고 밤에는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보여주는 곳인 데다가 밤마다 울어대는 짝 잃은 승냥이 울음소리는 무서움을 극대화시킨다. 그러니 게임에 지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우리는 아침이면 벌칙을 수행했는지 따지기 위해 그 암굴로 자주 올라가곤 했다.

어느 날 담배가 떨어져서 나는 담배를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 내가 원하는 담배가 그곳에 없었다. 시골이라서 싸구려 담배만 팔았다. 청자나 은하수 담배가 나는 필요했다. 때마침 법성포행 버스가 들어와서 그 버스를 탔다. 담배를 몇 갑 사서 주머니에 넣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암자로 돌아갈 수 있는 막차가 떠난다.
나는 소라다방을 찾아갔다. 그 노래가 듣고 싶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아가씨에게 커피를 주문하면서 '댄서의 순정'을 듣기 위해 왔으니 그 노래를 계속 들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녀의 친절한 미소에 깊은 흡인력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계속 반복되는 댄서의 순정을 듣고 또 들었다. 노래에 빠져있던 나에게 레지 아가씨가 유리컵에 담긴 붉은색의 음료 한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집에서 담근 포도주인데 드셔보시라는 말을 하고는 부끄러운 듯 물러났다. 순간 내 가슴에 환화게 불이 켜졌다. 더구나 처음 마셔보는 달콤한 술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갔다. 그러다 나는 헐레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출발할 때가 지난 것 같았다. 정류장은 텅 비어 있었고 거리는 어둠과 함께 한산해지고 있었다. 앞길이 막막해진 나는 조바심쳐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닷길을 선택해 가마미해수욕장을 향해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남도 땅의 겨울은 온화했다. 바람이 좀 세다고 느껴졌지만 춥지는 않았다. 다만
밤길을 혼자서 걷기에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등산복에 달린 모자를 단단히 썼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소리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파도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소리에 뒤섞여 사방에서 들려오는 통에 모골이 송연한 무서움이 엄습해 왔다. 담배를 피어 물었다. 그러자 담배불빛이 조금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래도 무서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달리기를 시도했지만 곧 숨이 차서 계속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외로이 들창가에 기대서서
슬픈 추억 속에 남 모르게 우는
애달픈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큰 소리로 목청껏 댄서의 순정을 3절까지 다 불렀더니 어둠에 적응되고 무서움이 경감되는 듯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 낯선 땅에 와서 홀로 밤길을 무서움에 떨면서 걷고 있을까? 그대는 모르겠지? 나도 모른다네. 나는 지금 애달픈 댄서가 아니라 나그네라네. 그러니 울어라 파도야, 산새들아, 승냥이들아. 마음껏 울어라 나와 함께 울어보자. 나는 댄서가 되어 그녀의 순정에 도달해 갔다.
그리고 소라다방 그 소녀가 추억처럼 아스라이 떠올랐다. 무서움은 이제 저만큼 비켜나서 바다 멀리 고기잡이 배의 불빛이 희망봉처럼 눈에 잡혔다.
 
개학을 앞둔 우리가 암자를 떠날 때가 왔다. 이곳에 공부하러 온 대다수 기숙생들은 고시생들이었다. 우리처럼 자유롭게 쏘다니는 문학도들은 스님이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스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암자를 떠났다.

법성포에서 광주행 버스를 탔다. 그러나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때 머리카락이 너무 길었다. 원래부터 긴 머리인 데다 두 달 동안 더 길어졌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시에는 큰 도시에 버스가 진입할 때 반드시 경찰이 올라와 검문을 했다. 나는 그 검문을 통과할 재간이 없어 보였다. 내가 검문에 걸리면 버스에서 내려야 할 테니 그냥 나를 버려두고 가라고 형과 친구에게 일러두었다. 광주 문화방송국 피디국으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형의 친구가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검문에 걸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친구였다. 두 달 동안 친구머리도 길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 앞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입영 날자를 받아놓고 있었던 친구는 입영 통지서를 내밀고 선처를 바랐다. 경찰은 수긍하고 물러났다. 야호, 우리는  환호했다. 그 경찰이 나를 여자로 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 파란 등산복을 입은 머리 조금 긴 여학생이었다. 여행은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4학년 때, 나는 이곳에서 구상했던 시를 학교 신문 주최 학술상에 응모해서 창작문학분야 본상을 받았다. <가마미 시첩>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심사위원이었던 서정주 시인에게    
신선하고 참신한 이미지가 좋았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그리고 50년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그동안 나는 많은 포도주를 마셨다. 포도주는 결코 그 소녀가 준 것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와인과 함께  50년의 세월은 차라리 찰나의 꿈이었다. 내가 마신 와인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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