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꼭지 삼천리 짱구 딸

"고맙다, 막내야"

by 꼭두

앞뒤 꼭지 삼천리 짱구 딸

"고맙다, 막내야"


간첩 신고, 불조심, 그리고 둘만 낳기


저는 1960년대에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1960년, 공주에서 결혼한 후 61년에 큰딸을 낳았어요. 1년 후인 62년, 큰딸은 품에 안고 둘째는 뱃속에 가진 채, 남편 손 꼭 잡고 서울로 올라왔죠.


5남 3녀 종갓집 맏며느리 시집살이 만 3년을 채운 후, 꿈 같은 서울 신접살림이 시작됐고, 상경한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들을 낳았답니다.


어찌 보면 철없던 젊은 시절에 정신없이 연년생 남매를 낳아 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남매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에서 ‘가족계획’이라는 걸 발표하더니 대대적으로 알리기 시작하더라구요. ‘간첩 신고’, ‘불조심’과 함께 ‘가족계획’에 대한 포스터와 구호가 넘쳐나는 시절이 시작된 겁니다.


제 기억에 가장 강렬했던 첫 구호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였고, 이어서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가 나왔어요.


남편이 이제 막 새로운 돈벌이를 시작한 서울 객지에서, 가난한 사글세살이를 하는 두 아이 엄마인 저로서는 많이 공감 가는 말들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현실 속에서 그 구호들은 먼 달나라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여전히 아들딸 차별은 당연하고, 많이 낳는 게 미덕인 시절이었으니까요. 다다익선은 필수, 남녀차별은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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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는 성에 안 찬 시부모님


충청도 종갓집에서 5남 3녀를 낳은 우리 시부모님이야 말할 것도 없었죠.


명절을 맞아 연년생 남매를 안고 업고 시댁에 가면, 큰손녀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시어머니는 뿌듯한 눈으로 그저 손자만 바라보시고, 시아버지는 손자만 안고 ‘우리 장손, 우리 장손’ 노래를 부르며 어화둥둥 어화둥둥 하셨답니다.


다시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긴 시간 동안 ‘아들 손주가 그렇게 좋으실까?’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솔직히 저도 속으로는 ‘이런 아들을 낳아서 내가 이렇게 행복하구나’ 싶었어요.


늘 입버릇처럼 "이런 아들 손주 하나만 더 낳으면 더는 바랄 게 없겠구나" 하시던 시부모님. 좀처럼 우리에게서 소식이 없자 드디어 일이 터졌습니다.


아들 손주 세 살 때 시어머니 생신을 모시러 갔는데, 시어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놈 같은 아이 하나만 더 낳자는데 이대로 그만이라는 거냐?” 하며 제대로 호통을 치시네요.


저는 눈치를 보다가 당시 한창이던 가족계획 캠페인에 용기를 얻어 더듬더듬 겨우 대답했죠.


“어머니,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자는 게 정부시책이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저희 형편에 아이를 또 낳으면 이웃 보기도 민망해요.”


더 크게 혼났습니다.


“부모가 새끼를 낳는 것도 정부 허락을 받는다더냐? 남들은 다 낳는데 왜 너만 유난이란 말이냐?”


그 시퍼런 서슬 앞에 더는 무어라 대꾸를 할 수 없었어요.


마침내 찾아온 '아들 엄마 딸'


드디어 아이를 또 가졌습니다.


시부모님의 압박과 맏며느리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저도 세상 잘생긴 제 아들을 보면서 ‘이런 아들 하나만 더...’ 하는 마음이 늘 있었고 제게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남편의 속마음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저는 이웃에게 민망해하는 대신, 동네방네 자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보란 듯이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나는 또 아들 낳을 거다”, “나는 또 아들 엄마다” 큰소리를 쳤어요.


속마음에 꼭 아들을 낳을 것 같았기에 더욱 의기양양했죠.


옆집 동갑 친구가 산파를 해주는 가운데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딸이더군요. 내심 실망이 컸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아챈 산파 친구가 말합니다.


"건강한 자식을 또 낳다니 정말 장하고 부럽다."


그 말을 듣고 갓 태어난 아이를 다시 보는데, 얼마나 이쁜지 그제서야 기쁨의 눈물이 제대로 터지더라구요.


‘또 아들 엄마’라고 한껏 미리 입방정을 떨었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동네 엄마들의 놀림이 시작됐어요. 저만 보면 “어이구, 우리 아들 엄마 딸 좀 보자” 하더니만, 나중에는 아예 우리 막내딸 이름을 "아들 엄마 딸"로 부르더라고요.


아이의 외모도 좀 특이했어요. 이마도 많이 나온 편인 데다, 뒤통수는 나오다 못해 뾰족할 정도였답니다. 특이한 두상 때문에 아이가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늘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죠.


사람들이 아이의 별명을 하나 더 만들었어요.


"앞뒤 꼭지 삼천 리, 빙빙 돌아 구천 리"


저는 임예진이 좋아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짱구인 게 흠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안 이쁜 취급을 받던 시절이기는 했고, 아무튼 사람들에게 이쁘다는 소리는 별로 못 들어본 우리 막내딸.


제 눈에는요? 말해 뭣해요. 세상에서 제일 이쁘죠. 남들이 그렇게 놀릴수록 저는 “우리 못난이, 이 이쁜 이마하고 뒤통수 좀 보슈.” 하면서 함께 놀았답니다.


제 눈에만 우리 딸의 앞뒤짱구가 매력적인 게 아니라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70년대 최고의 원조 국민 여동생, 배우 임예진의 등장입니다. 임예진의 별명이 ‘짱구’였어요. 임예진은 실제로 제 막내딸처럼 앞뒤짱구고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짱구라는 애칭이 함께 했죠.


다들 ‘짱구 임예진’에 열광했고, 그때부터 짱구는 여자의 매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아예 엄마들이 아이의 두상을 짱구로 만들기 위한 짱구 베개가 필수 육아용품이라면서요?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짱구 임예진, 국민배우 임예진은 제게 정말 고마운 배우입니다. 전 임예진이 좋아요.


제게 첫딸은 첫사랑이었고, 둘째는 든든했고, 셋째는 ‘얘를 안 낳았으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면서 제일 이뻐하며 키웠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이는 낳으면 낳을수록 더 이쁘다는 것과 함께, 하나 더 낳았으면 더 좋았으려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니까요.


"제발 그만 좀 낳아라" 하던 정부가, 이제는 "제발 아이 좀 낳아달라" 애원하는 시대로 바뀌었죠. 저는 모든 걸 떠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낳기만 해봐라, 얼마나 이쁜데" 하고 싶지만, 무책임하고 노망난 노인 취급받을까 무서워 섣불리 입을 열지는 못한답니다.


세상 다 가진 기쁨을 내게 안겨준 '앞뒤 꼭지 삼천리' 우리 짱구 딸, 이쁘게 잘 자라주어 새삼 고맙고 대견하지요.


"고맙다, 막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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