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동 산1번지

“우리, 집 지으러 갈래?”

by 꼭두

홍은동 산1번지

“우리, 집 지으러 갈래?”


셋방살이의 서러움


아무 가진 것 없이, 남편과 서로 손 하나 꼭 붙들고 서울 올라온 지 9년 만에 내 집을 마련했죠.


넉넉하지 못했던 시댁. 하지만 여전히 종갓집 8남매 집안의 맏며느리 몫은 남아 있었기에 온갖 구덥을 치러야 했던 타향살이. 남편의 힘겨운 벌이로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한다는 건 그저 남의 일처럼 멀기만 했습니다.


내 집 마련의 꿈이 아득한 것보다 정작 힘들었던 건 타향에서의 셋방살이 9년이었답니다. 그 고단했던 시절을 지나온 분들이라면 다들 겪어 보셨겠지만, 저도 참 굽이굽이 서러운 일이 많았어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움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새끼들이 기 못 펴고 사는 게 가장 큰 설움이더군요.


한번은 제 아들과 주인집 아들이 동갑이었어요. 마당에서, 집 앞에서 뛰어놀기 시작할 무렵부터 늘 주인집 아들에 치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더군요.


그 무렵의 아이들이 그렇듯 같이 놀다 보면 힘겨루기할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 쪽은 늘 우리 아들이었어요. 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럴 때마다 너무 속상하기만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 차이가 좀 있으면 차라리 나은데, 내 아이를 주인집 또래 아이와 함께 키우는 게 셋방살이의 가장 힘든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 그리고 ‘1번지’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불쑥 “우리, 집 지으러 갈래?” 하는 거예요.


홍은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새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싸게 마련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택지개발 같은 거죠. 조금 가파른 언덕이라 집짓기가 만만치는 않을 거라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은 들리지도 않고 그저 설레고 좋기만 하더라고요.


“우리 집만 생길 수 있다면 백두산 꼭대기라도 올라갈 수 있어. 어서 가요!” 했죠.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에 도착해보니 말이 언덕이지 거의 산이더군요.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이 산을 깎고, 길을 만들고, 터를 다지며 집을 짓고 있더라구요. 그 새로운 사람들과 동네 이웃이 되기 위해 그야말로 맨손으로, 온전히 우리 힘으로, 우리 집을 지었습니다.


꼬박 두 달여 만에 일단 최소한의 안방과 부엌을 만들 수 있었고 대문도 세웠습니다. 그 대문에 문패를 달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주소도 잊지 못해요.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 ‘산’ 그리고 ‘1번지’.


우리 부부와 아들딸 3남매가 기 펴고 살 수 있는 우리 다섯 식구의 보금자리. 꿈만 같았어요.


집짓기는 계속됐습니다. 안채를 더 크게 지어 우리 식구는 그리로 옮기고 살던 곳은 사랑채로 해서 세를 주었죠. 저도 서울에서 세입자를 거느린 집주인이 된 거예요.


산마루 우리 집의 행복


그곳에서 막내딸이 국민학교에 입학했죠.


그런데 며칠 후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딸이 “엄마, 나 이제 학교 그만 갈래” 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아니, 왜?” 하고 물으니,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다 보면 친구들은 하나, 둘 집에 도착하는데 우리 집이 제일 멀고 길도 가팔라서 너무 힘들어” 하네요.


저는 막내의 그 말이 안쓰러워 “어이구 힘들었구나, 우리 막내딸” 하는데, 옆에 있던 큰 아이들 둘이 웃으면서 마치 핀잔을 주듯 막내에게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너, 남의 집 사는 게 어떤 건지 모르지? 조금 멀면 어떠냐? 여기가 우리 집인데”.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아이들이 표현을 하지 않아 몰랐었는데, 알게 모르게... 너희들도 맘껏 기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이 힘들었구나. 그래도 그 원망을 부모에게 하지 않고 잘 참고 잘 살아줬구나. 정말 고맙고 장하다. 내 딸, 내 아들아.


그저 눈으로만 아이들에게 말을 전했답니다. 다시 한번 타향 셋집의 서러움과 우리 집의 행복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구요,


그 막내가 어느덧, 이제는 졸업을 앞둔 두 대학생의 어머니네요.


‘고생했다,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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