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과 꽁보리밥

남편의 유산 첫 번째

by 꼭두

연금과 꽁보리밥

남편의 유산 첫 번째


남편의 귀향


제 남편은 아주 젊은 나이에 저를 너무 일찍 떠나갔어요.


남편이 고향 마을의 선산으로 돌아간 지 삼십 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틈만 나면 떠오르는 남편의 모습을 따라, 저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아득하게 되짚어보고는 합니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황혼이혼이나 졸혼, 혹은 노년의 부부싸움 이야기를 어쩌다 듣게 되면, '강 건너 남의 일'이 그저 부럽기만 하고, "행복한 비명 지르고 있네" 하며 무심한 척 한마디 보태줄 뿐이지요.


남편과 함께한 것, 남편이 남겨준 것 중 떠오르는 첫 번째는 '연금'과 '보리밥'의 기억입니다.


하나는 지금 떠올려봐도 '내가 참 잘한 거지?' 생각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남편에게 왜 그랬을까?' 하는 미안함입니다.


나이 육십을 몇 년 남기지 않고 남편이 정년퇴직했어요. 퇴직금을 주며 남편이 제게 그러더군요.


“우리 노후 감당하기에는 좀 모자라 보이는데 어쩌나.”


남편이 종갓집 장손의 책임을 다하고자, 서울이라는 엘도라도에서 이루려 했던 사업가의 꿈. 무작정 상경 작전과 타향 객지에서의 고단한 삶. 그 모든 것을 감내했지만 결국 제대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어요. 다 된 것 같은 순간마다 닥쳐왔던 시련과 함께, 남편은 속절없이 늙어갔죠.


마지막 직장은 강남의 관세청이었어요. 시골 깡촌 마을에서 '전설의 면서기'로 시작해서, 잠시 서울 광화문의 문교부를 거쳤던 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평생 관직인 사주팔자를 지키고 살았어야 해." 하던 점장이들 말이 맞았던 걸까요?


하지만 남편은 그렇게 가장의 책임을 내려놓고 편히 늙기를 또 거부했죠. 다시 종로에 본인의 사업장을 열었어요. 우리 집을 포함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담보로 사업 자금을 마련해서. 제법 큰 규모로.


저와 딸들이 그리도 말렸지만 소용없더군요. 뜻밖에도 아들은 그러더군요. 아버지가 아버지 재산으로 아버지가 그리도 하고 싶은 일 하시겠다는데 그렇게 해드리자고.


남편의 '마지막 승부'는 이번에도 힘들었어요. 그것만으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이제 그만하면 됐어요. 그만합시다.' 말을 꺼내야 한다, 늘 기회를 찾고 있던 어느 날. 하늘이 꺼져내리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말기 암이랍니다.


많이들 그러시는 것처럼 '오진의 간절함'을 품고, 여러 곳을 거치며 그때마다 그 힘든 검사를 했죠. 결국 서울중앙병원에서 최종 확진을 받았습니다.

'서울중앙병원'은 '서울아산병원'이 개원할 때의 이름입니다. 오랫동안 불린 이름표죠.


지금은 더하겠지만 당시로서도 너무 이른 나이에 받아들여야 했던 뜻밖의 일입니다. 남편에게 허락된 시간이 이 년이 되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이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요.


남편 나이 불과 58세. 서울이 기록적 폭염을 기록했다는 1994년 여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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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연금


투병 생활 일 년을 넘긴 어느 날. 국민연금공단에서 남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국민연금을 받을 나이가 됐으니 신청하러 오라고요.

요즘 만 65세 이상이면 받게 되는 '기초연금'이 그때는 없었습니다. 연금공단에서 신청하라 한 건 국민연금 가입자가 받게 되는 '노령연금'입니다. 그 당시에는 퇴직과 함께 일찍부터 받을 수 있었죠. 월 연금으로 혹은 일시불로.


남편이 제게 그러더군요.


“내가 가도 50%의 유족연금을 당신이 받을 수 있어. 많이 부족하지만 그걸로나마 당신 노후 자금이 됐으면 해.”


노후에 매월 받는 게 연금이지만, 당시에는 즉시 일시불로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선택을 해야 하는데 매월 받는 연금으로 신청하겠다는 남편의 말이었죠.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 정말 곰곰이 생각했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더군요.


되짚어보면 깡촌에서 결혼한 우리. 아무것도 손에 쥔 것 없이, 아는 이 하나 없는 서울 객지에 그저 단둘이 손잡고 올라와, 처자식 꾸려가며 힘들게 살아온 남편 아니던가요. 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금, 젊은 날 남편이 힘들여 모아놓은 그 마지막 유산을 제게 쓰라며 주고 가겠다니... 저는 못 받겠더라구요.


마음을 굳힌 제가 남편에게 말했어요.


“나 당신 없이 돈 쓸 일 없어. 그 돈 한 번에 받자. 일시불로 받아 당신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데 쓰자구요.”


고개를 흔드는 남편을 계속 설득했습니다.


“우리 그 돈으로 아직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좋은 곳 같이 놀러 다녀요. 우리 둘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쳐다보기 안쓰러운 쓸쓸한 모습으로 연금공단에 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제 말대로 일시불 수령을 신청하니, 담당 직원이 계속 만류한답니다. 매월 연금으로 받는 게 훨씬 이익인데 왜 일시불로 받으려 하냐면서, 매월 연금 신청을 강력하게 권하고 있다네요.


“내 입으로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당신이 대신 말해주면 안 될까?”


전화를 건네받은 제게도 설득을 시작하는 직원에게 제가 간결하고 단호하게 말했죠.


“제 남편이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답니다. 그 돈 일시불로 받아 남편 가기 전까지 오직 남편을 위해 쓰고 싶어서 그래요.”


제 말을 듣자마자 잠깐 멈칫하던 그 직원. 더는 아무 말 없이 담담하게 답하더군요.


“잘 알았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드릴게요. 지금 즉시 입금할 테니 확인하세요.”


그렇게 받은 남편의 연금은 남편과 제가 알뜰하게 다 쓸 수 있었고요. 남편은 환갑 되던 그해까지 투병 생활을 마친 후, 그 이듬해 설을 함께 맞이하지 못하고 제 곁을 떠나 고향 선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은 유산으로 유족연금을 제게 남겨주려 했으나 제가 그 뜻을 따르지 않았죠. 저보고 잘 쓰라던 남편의 말을 들었더라면 제게 큰 힘이 됐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그때가 다시 온다고 해도 저는 그때처럼 할 테니까요.


관악산 보리밥


저는 보리밥을 싫어합니다. 정확하게는 싫어했습니다. 남편을 보내기 전까지는.


옛날 우리나라의 '보릿고개'를 아시지요? 가을부터 겨울까지 쌀밥을 먹다가, 이듬해 초여름부터 다시 추수를 하는 추석 전까지는 보리밥만 먹어야 했던 시절을 부르는 말이죠.


많이 먹어도 쉽게 꺼지던 보리밥. 더구나 저는 보리밥을 먹으면 자주 배앓이를 하는 체질이라 보리밥이 싫었어요. 어릴 때부터.


남편은 보리밥을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사는 내내 좋아했어요.


서울에서 강동구에 정착하기 전, 관악구에서 몇 년 살았는데, 남편은 일요일 새벽마다 관악산에 오릅니다. 저는 한복점 운영에 본격적으로 매달리던 무렵이라, 등산 따위는커녕 늘 잠이 부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죠.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모자란 잠을 자죠.


늘 혼자 관악산을 다녀야 했던 남편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요. 마치 주인하고 산책이 고픈 강아지처럼. 저를 애타게 쳐다보면서.


"혼자 등산이 참 외로워. 남들은 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다니던데... 한번이라도 둘이 함께 산에 오르면 엄청 좋긴 하겠지..."


그럼 등산친구를 만들던가, 오직 '아내 바라기'만 하는 남편이 부담스럽기만 하던 어느 날. 새벽부터 미싱을 밟고 있는 저를 보며, 또 세상 가여운 표정을 하고 말하네요.


"나 지금 관악산 갈 건데..."


못 들은 척 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오늘만 특별히 '은혜'를 베풀기로 합니다.


"아이고~ 갑시다, 가! 대신 언능 다녀옵시다."


남편은 신났습니다. 헉헉거리며 비탈길을 거의 기어오르는 저를 보면서도 흥이 넘칩니다.


"조금만 올라가면 기가 막힌 밥집이 있어. 자, 힘을 내자구!"


밥집에 도착했습니다. 메뉴는 달랑 하나, 비빔밥. 박을 타서 만든 큼직한 대접에 각종 나물을 수북하게 쌓아 얹어 강된장과 함께 나왔는데 먹음직스럽네요. 저, 나물이라면 환장합니다.


급한 마음에 어서 비비려고 뒤집으니, 이럴 수가, 바닥에 깔려있는 게 보리밥입니다. 그것도 꽁보리밥. 어찌나 배신감에 화가 나던지 거칠게 밥을 섞는데, 힘을 너무 준 건지, 화를 너무 섞은 건지, 박 대접이 '퍽' 하고 뒤집히면서 보리밥이 사방으로 날아가네요.


'똥 뀐 놈이 성 낸다' 했던가요? 무안해진 저는 오히려 성질을 부렸어요.


"나 보리밥 싫어하는 거 몰라? 잠이나 더 자게 두지, 고작 꽁보리밥 사주려고 나를 이 산비탈을 끌고 올라온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제가 생각해도 남편한테 이리 성질부려 본 적이 없는데 그날따라 심했어요.


하지만 남편은 쩔쩔매며 수습하기 바쁘네요.


"이 정도로 싫어하리라곤 생각 못 했어. 게다가 이 집 아주 유명한 집이라 이 정도면 당신 입에도 맞을 줄 알았지."


그러고는 저를 서둘러 일으켜 세우네요. 맛있는 쌀밥 집이 바로 옆에 있답니다. 그곳에서 불고기 곁들인 뽀얀 쌀밥을 먹으니, 화가 좀 누그러집니다.


다시 흥이 오른 남편, 눈치없이 덧붙이네요.


"내 다시는 보리밥 먹잔 소리 안 할게. 이천 설봉산도 괜찮다던데 우리 다음 주에는 이천쌀밥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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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날 부부 동반 관악산행을 해프닝 속에 마쳤는데, 남편이 떠나고 난 후 그때 그 일이 두고두고 떠오르면서 남편을 향한 미안함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이제 와서 다시 관악산 보리밥 먹으러 가자고 할 남편은 더 이상 제 곁에 없고, 원래 보리밥 좋아했던 남편이기에 생전에 그렇게 보리밥 좀 해달라는 타령을 들으면서도, 한번도 해주지 않았던 기억까지 겹쳐지면서, 그날의 일이 목의 가시처럼 아파옵니다.


저는 청개구리인가 봐요.


늘 생전의 엄마 말은 반대로 하던 청개구리가, 엄마가 떠난 후엔, 마지막 유언을 따라 강가에 어머니 무덤을 만들고는, 비 오는 날마다 엄마 무덤 떠내려갈까 봐 운다더니 딱 그 꼴 아닙니까?


그날 성질부린 거 사과하고 싶고, 함께 관악산 가서 그 꽁보리밥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입니다.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신기하게 아들도 강된장 얹은 산나물 꽁보리밥을 아주 좋아하더라구요. 남편 대신 아들과 꽁보리밥 자주 먹게 됐어요.


먹을 만하더라고요. 맛있어요.


받으라는 유족연금 싫다 하고, 함께 먹자는 보리밥도 싫다 하더니 이제 와서 이러고 있답니다. 남편이 유산으로 남겨주련 한 연금을 제가 마다하자, 꽁보리밥을 대신 남겨주고 갔네요. 고집스런 양반.


"꽁보리밥 꽤 맛있구먼,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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