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빠의 전쟁
15년 만의 다시보기
'해양천국(海洋天堂, Ocean Heaven)'이란 영화.
제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우연찮게 보게 된 영화죠. 뜻밖에도 액션영화 스타인 이연걸이 정통 드라마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
이연걸. 헐리웃까지 진출한 월드클래스의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소비되지 않은 배우죠. 이소룡, 성룡, 주윤발이 한국에서 누렸던 인기에 비하면 말이죠. 하지만 이연걸 특유의 동안과 순박한 외모가 자폐아들의 유일 보호자인 싱글아빠 역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더군요.
청년 자폐아들 '따푸' 역을 맡은 배우 문장 또한 맑은 표정 연기가 그만이고요. 당연히 제 아들의 수려한 외모만큼은 못 하지만.
한국에 자폐를 처음으로 알렸던 우리나라 영화 '말아톤'의 감동과 흥행 이후, 5년 만에 나온 자폐 소재의 영화여서인지 '홍콩의 말아톤'이라는 소리와 함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스크린 개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걸 보면 역시 이연걸은 한국에서 푸대접받는 게 맞다니까요.
비장애인 부모들이 보기엔 그저 흔한 클리셰 가득한 신파 영화 정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저는, 마치 '진주만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당황했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솟구치더군요.
제가 2025년에 받아들였던 여명(餘命)을 버텨내고 2026년을 맞이한 첫날에 이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며칠 동안의 추적 끝에 2025년 마지막 날에 어렵사리 DVD를 구했거든요. 그리고 15년 전, 제가 기습적으로 당했던 슬픔의 이유를 찾았어요.
시나리오 때문이었습니다.
말아톤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이'의 실존 인물은 '배형진'이라는 분입니다.
84년생이니 99년생인 제 아들보다 열다섯 살이 더 많은 '한국육영학교' 선배죠. 제가 힘든 선택 끝에, 아들 손을 잡고 한국육영학교라는 자폐아 특수학교를 처음 찾았을 때, 현관 로비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던 말아톤 포스터의 기억이 새롭네요.
말아톤은 실제상황을 영화로 가져왔고, 자폐아 부모의 아픔을 제대로 옮길 수 있었죠. "제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죠?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거예요."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모든 자폐아 부모의 가슴을 때렸던 이 명대사들은 작가의 창작이 아닙니다.
놀라운 시나리오, 경이로운 예지력
15년 전엔 '홍콩의 말아톤'이라는 딱 한 가지 정보만 가지고 영화를 봤어요. 이연걸이 나온다는 것도 모른 상태로.
영화 속 상황들은 당시로서는 제가 실감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고, 자폐아 아빠인 저조차 신파라는 느낌 정도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원인 모르게 솟구치는 눈물에 당황하며 '놀라운 연출이다. 참 뛰어난 감독이구나.' 했더랍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 감독이 같은 사람입니다.
정작 놀라운 건 연출이 아니라 시나리오란 걸 15년 만에 알게 됐어요. 그래봐야 같은 사람의 힘이긴 하군요.
해양천국은 말아톤과는 다르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시나리오는 누군가의 체험 없이는 절대 쓸 수 없습니다. 오늘 15년 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제가 잠결에 그 작가와 인터뷰라도 했었던 건가, 한참 기억을 더듬어볼 정도였거든요.
놀람을 넘어 경이로운 건 그때부터 생겨난 제 예지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2025년의 제 상황과 2010년 이연걸의 영화 속 상황이 싱크로율 99%입니다. 예상못한 기습에 당황했던 슬픔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예견했던 슬픔이었나 봅니다.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긴 했어요. 이연걸까지 출연시킨 상업영화에서 왜 보기 드문 설정을 했을까? 말아톤처럼 고군분투하는 엄마가 훨씬 더 신파적 흥행에 어울릴 텐데 하면서 말이죠.
지금까지도 저는 제 경험 속에서 나홀로 아빠가 자폐 자식을 키우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저 말고는 없었어요. 반대의 경우는 가끔 봤습니다. '왜 바보 자식을 낳았냐?'며 자폐 자식과 아내를 내치는 남편과 시가(媤家)가 실제로 있어요. 문명국의 시민은 아니겠죠.
엔딩 크레딧을 숨죽이고 쳐다보다가 이 작가와 감독에 대해서, 이 영화의 배경에 대해서 한참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더군요. 그다지 유명세가 있지도 않고 각본을 쓴 것도, 연출을 한 것도 몇 작품 안 되는, 저보다도 나이 어린 작가면서 감독이던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이런 시나리오의 사연을 만들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를 아들보다 오래 사는 장수 생물인 바다거북으로 환생시키려 한다든가, 아들과 아빠에게 그 상황에도 찾아오는 멜로까지 다소 상투적 신파는 오히려 이해가 되더라고요. 감독의 연출일 뿐 실화는 아니니까요.
저는 영화를 허구 세계를 통해 대리 만족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신데렐라 컴플렉스'나 '왕자병, 공주병'을 해소시켜주는. 그런데 새삼 실제 세계를 스크린에서 보는 대리 체험에도 유효하구나 싶습니다. 그게 허구든 실화든 관계없이.
흔한 신파 영화로 보셔도 볼만합니다. 저처럼 애써 DVD를 구하려 하지 마시고 TVING, 왓챠 등의 OTT 서비스나 유튜브 영화로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러닝타임도 짧아요. 97분입니다.
저는 제 말과 글로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을 훨 더 좋아합니다. 영화의 내용을 전하는 일은 드문데, 새해 첫날에 다시 본 '해양천국'에 대해, 감상평을 넘어 조금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회고록'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면서 구구절절 쓰고 있는 글들 대신 읽어보셔도, 그냥 제 넋두리 듣는 것과 똑같거든요.
혹시 압니까? 여러분들도 15년 전 저처럼 당황하게 되실 수도요.
미리 말씀드릴 건, 결말을 포함하는 100% 스포일러이니 영화를 직접 보실 분들은 영화 시청 후에 후기 삼아 읽어보시길요.
아빠의 마지막 소망과 전쟁
영화 속 배경은 중국의 작은 도시입니다.
첫 씬은 이른 아침 바다 위에 떠 있는 허름한 나룻배.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에 굵은 줄로 자신과 아들 '따푸'의 발목을 단단히 묶고 있는 이연걸입니다.
"아들아, 이제 가자." 한마디와 함께 주저 없이 바다로 뛰어드네요. 둘 다. 콘크리트 덩어리도 함께.
'저거 설마 그 동반자살? 못살겠다, 죽어보자. 저걸 저렇게 시작부터 대놓고 보여준다고?' 너무 쉬운 연출에 대한 실망? 그런 느낌이었어요. 15년 전엔.
게다가 어설프거든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어요.
따푸는 "물고기가 따로 없군." 소리를 듣는 물의 왕자입니다. 심지어 그는 돌고래와 대화도 할 줄 아는 물의 능력자거든요.
이에 답하는 아빠의 대사는 "사람으로 잘못 태어나 자폐가 된 아이죠."고요. 여유롭게 바다 수영을 즐기더니 가볍게 줄을 풀고 아빠까지 구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빠는 따푸에게 "아빠랑 같이 가기 싫었니? 아빠 가면 누가 널 돌봐줘!" 하며 하소연하죠.
여기서부터 2025년의 저와 싱크로 99%의 아빠, 이연걸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됩니다.
아빠는 50을 막 넘긴 나이에 4개월의 여명을 진단받은 말기 간암 환자입니다. 지역의 큰 해양수족관에서 일하는 고참 관리인이고요. 물부터 전기까지 모든 걸 능숙하게 책임지는 장기근속자. 수족관의 맥가이버.
따푸가 어렸을 땐 특수학교, 치료시설을 다녔지만, 청년이 되면서 아빠가 직접 보살필 수밖에 없었죠.
따푸는 아빠 따라 그 해양박물관을 함께 출퇴근하면서, 여의도의 63빌딩 아쿠아리움보다 더 커 보이는 대형수족관에서 바다표범, 돌고래, 물개와 어울려 수영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물의 여왕이었던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능력 덕분입니다.
따푸를 너무 사랑해서 매일 따푸와 물에서 노는 걸 제일 좋아하던 엄마는, 따푸의 자폐를 알게 된 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물속에서 스스로의 사고사로 생을 마감했고, 그때부터 이연걸은 나홀로 아빠가 됐습니다. 제가 아들의 유일 보호자가 됐던 때와 같은 일곱 살 때.
어떻게든 아빠와 따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이웃 여인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왜 그랬어요?"
그때까지는 본인의 병과 결심을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들과 함께 조용히 떠나가려 했던 아빠가 답합니다.
"저 혼자 가면 따푸 혼자 고생하니까, 같이 가는 게 편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승사자도 따푸를 포기한 걸 보니, 따푸는 더 살아보라는 신의 뜻인 거 같아요."
"어떤 시설에서든 거둬주지 않을까요?"
"거둬주지 않으면요? 거둬줘도 평생이 아니면요? 평생 거둬줘도 행복하게 해줄까요? 제가 죽기 전에 해결해야만 해요."
아빠의 전쟁은 처절하지만, 어떤 시설에서도 따푸를 받아주지 않아요. 온갖 이유를 대면서 따푸를 거절합니다.
고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곳을 찾아가서는, 늘 품속에 넣고 다니는 여명이 적힌 진단서를 보여주며 곧 고아가 된다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급기야 정신병원까지 찾아가 보지만, 그곳의 삭막한 풍경을 보고 두려움에 온몸을 떠는 따푸를 데리고 돌아 나옵니다.
어쩌면 저리도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짓과 똑같고, 2025년의 대한민국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지요.
저러다가 이번엔 아예 망망대해로 또 나룻배 띄우면 어쩌나 초조하던 그때, 극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따푸가 청년이 되기 전 9년간 다녔던 치료시설의 원장님 딸이 어머니 뜻을 따라 자폐 장애인을 위한 거주시설을 만들었어요. 아직은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다소 옹색한 민영시설이지만 아빠에게는 기적입니다.
그래도 전쟁은 계속됩니다.
"아빠 기억해 줄 거지?"
어느 날 밤 아빠를 긴급하게 찾는 시설의 연락을 받습니다.
이제 잠들어야 할 아들이 옷을 벗지 않고 울면서 자해를 하고 있어요. 자기 손으로 머리를 때리고 벽에 찧고를 반복하면서.
아빠를 보더니 침대에 앉아 양손을 들어 올려요. 아빠는 아들의 옷을 벗겨주고요. 그제서야 진정하고 잠을 청하는 따푸. 집에서 아빠와 잠들 시간이면 매일 웃으면서 함께하던 놀이입니다.
다음 날 아빠는 간이침대를 들고 자신의 거처를 시설의 아들 방 침대 옆으로 옮겼습니다.
수족관 대표에게는 아들에게 청소라도 시켜달라고 간청하면서, 따푸에게 집과 수족관을 다니는 생활을 가르칩니다. 반복 교육은 인지가 불가능한 자폐아에게 행동을 심어주는 거의 유일한 교육법입니다.
의학에서는 이걸 반복을 거듭해 습관으로 만드는 '암묵기억' 만들기라고 하죠. 무의식 기억으로 의식적 기억을 대신하려는 겁니다.
집에 오면 열쇠로 문 열기. 옷의 종류별로 서랍 위치 기억하기. 혼자 옷 벗기. 따푸가 제일 좋아하는 삶은 달걀 만들기. 아이스크림은 돈 주고 사 먹기.
가장 큰 숙제는 혼자 버스 타기입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계단의 숫자를 세어가며 걷고 또 걷기. 버스가 도착하면 올라탄 후 내릴 정류장이 되면 '내릴게요'라고 말하기. 2010년 중국은 아직 하차벨이 없고 안내원이나 운전사의 '내리실 분?' 질문에 답을 해야 버스를 세워주더군요.
수족관에서 혼자 버스를 태운 후 택시를 타고 쫓아와 숨어서 지켜보지만, 한 번도 성공은 못 합니다.
15년 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초등학생 제 아들이 등교할 때마다 24층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1층에서 내리기. 걷는 코스를 늘 똑같게 해서 횡단보도 안전하게 건너기. 버스가 오면 혼자 타기를 한 학기 동안 반복하며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저 역시 아들 혼자 그 모든 걸 해내는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결국 성공하진 못했어요.
아빠의 그 전쟁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이웃들. "이제 살 곳도 찾았는데 왜 계속 고생하세요?" 하는 이웃에게 "따푸가 혼자 살아가는 법을 알기 전까지는 계속하려고요. 걱정되니까요. 전 괜찮아요. 난 아빠니까 당연하지만, 같이 힘들려 하지 마세요."라고 답하는 아빠.
"아버님, 염려 마세요. 저희가 있는 한 끝까지 아드님을 보살필게요. 아버님을 알게 돼 영광입니다." 말하는 시설의 원장. 끝까지 관심을 놓지 않는 이웃에게 증명사진을 건네며 영정사진으로 써달라는 아빠의 말이 이어진다 싶었는데.
그러다가 기습적으로 장례식 씬이 등장해요. 조문객들은 맑은 표정의 어린 상주만 쳐다봅니다. 수족관 대표가 시설 원장에게 아빠가 따푸의 옷 등에 꿰매 붙인 천, 이미 따푸의 증상과 보호자 연락처가 빼곡하게 적혀있는 천을 가리키며 부탁합니다. "보호자에 제 이름도 넣어주세요. 따푸는 수영을 해야 하니까요."
15년 전, 처연하고 기습적인 2분 정도의 장례식 씬이 끝난 후 쓸쓸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어 서둘러 일어서려는 저를 당황시키던 두 번째 기습이 이어지네요. 영화는 계속됩니다. 그 대신 늘 옆에 함께하던 아빠와의 투샷이 아니라 아들 단독샷입니다. 아빠 없는 세상이 실감되면서 보자마자 그저 외롭습니다.
아마도 마음 속으로 그랬을 겁니다.
'내 아들도 어느 날 저렇게 혼자 남겠지.'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아빠가 그토록 부탁하던 대로 TV 위에 놓인 인형을 잘 정리해서 의자에 옮겨 앉힌 따푸가 혼자 달걀을 삶아 먹고는, 혼자 그 계단을 걸어 혼자 그 수족관행 버스에 탑니다. 한 번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내릴게요.' 말하고는 버스에서 내립니다. 안전하게 잘.
너무 의젓하게 아빠가 가르쳤던 모든 걸 해내는 따푸를 보면서 대견한 건지, 가여운 건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저는 저도 모르게 울음이 솟았고 그렇게 기습적으로 당한 1분의 에필로그가 이 영화의 마지막인 줄 알았습니다. 더는 앉아서 볼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15년 만에 다시 보니 그 뒤에도 4분 정도의 에필로그가 더 있었네요. 달라지는 건 없더군요. 홀로 남겨진 따푸가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면서 혼자 달걀을 까먹으며 아무리 의연하게 행동해도, 이웃들이 잘 지켜봐 주리라 위로하면서도, 가여운 마음만 더해질 뿐이었어요.
벌써 5년 넘게 자폐 자식의 나홀로 아빠를 하고 있었으면서도, 15년 후 자신의 이야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그저 자폐를 소재로 한 신파 정도로 지켜봤던 영화.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터지는지 영문을 모르겠던 영화. 해양천국.
2010년의 그 영화 스포로 위장한 2025년 제 전쟁 이야기를 마칩니다.
제 전쟁은 2010년 아빠의 중간쯤인 것 같고 결말은 아직 모릅니다.
무심하게 잠드는 아들의 등 뒤에서 "아빠가 곁에 없어도 잊지 않을 거지? 아빠는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 거야." 하던 아빠의 모습만 자꾸 떠오르네요.
아빠가 아들을 잊지 않듯, 아들도 이웃도 아빠를 기억해 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