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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Nov 27. 2024

대놓고 지인찬스를 쓰는 캐나다

32. 로컬 경험을 위해 시작한 자원봉사

공무원이 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막연했다. 나에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좁은 인맥으로 주변에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반갑지 않은 코웃음뿐이었다.


네가 무슨 공무원이야 공무원은..

이곳 사람도 되기 힘들다는 공무원을
네가 무슨 재주로 해.

일할 데가 얼마나 많은데,
시간낭비 하지 말고 다른 식당이나 알아봐.

나를 향한 비아냥이 빨갛게 벗겨져 드러난 피부를 건드리는 것처럼 쓰라렸다. 그들의 말이 진리일지 아니면 스스로 이민자의 한계를 규정짓는 말에 불과한지는 내 도전에 대한 결과만이 말해줄 것이다.




구직에 앞서 이력서 만드는 부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경력으로만 가득 채워진 나의 이력서는 이곳에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 색채가 강한 이력서의 형식부터 바꿔야 했다. 캐나다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형태의 이력서에 대해 찾아보며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이력서를 훑어봤다.


이력서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가장 활용도가 높은 세 가지는,
1. 최근 이력부터 보여주며 경력을 부각한 연대기형 이력서(Chronological Resume),
2. 스킬이나 강점을 강조한 형식으로 사회 초년생에게 적합한 기능형 이력서(Functional Resume),
3. 스킬과 경력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혼합형 이력서(Combination Resume)다.


한국에서의 경력만 놓고 본다면 나에게는 시간대별로 정리한 '연대기형'이 맞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엔트리 레벨(entry level)에서 시작해야 하는 신입이다. 신입이지만 '기능형'의 이력서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다. 캐나다라는 국가 자체에도 신입인 내가 로컬 잡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곳 시스템에 적응할 수  검증된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다. 스킬이 먼저 보이는 이력서를 만들되 나의 직업적 성취를 통해 적응능력을 녹여내야 한다. '혼합형'이 나에겐 최적이지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칫하면 욕심을 부려 방향을 잃은 애매한 이력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킬과 경력이 균형을 이루는  장짜리 형식을 갖추기까지 수차례 수정을 거치고 경력을 걸러냈다.


이력서 작업을 마친 후 커버레터(cover letter, 자기소개서) 샘플을 찾아다녔다. 커버레터는 나의 배경이나 성격, 장단점을 일반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 이력서에 담지 못한 부분을 보완설명해 주는 역할이 강했다. 지원하는 포지션에 나의 스킬과 경험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어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즉, 이력서에 명시된 나의 하드 스킬, 소프트 스킬, 학력, 경력이 한 장짜리 커버레터를 통해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에 명시된 역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같은 맥락에서 보여줘다. 정형화된 커버레터를 사용할 수는 없는 이유로 지원하는 곳마다 내용 수정이 필요했다.


*하드 스킬(hard skills): 교육 또는 현장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
*소프트 스킬(soft skills):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에 필요한 개인적 속성 및 정서적 지능


단 한 장에 모든 걸 담아야 하는 커버레터도 모범답안 같은 형식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형식이 좋지 않으니 지원하는 포지션에 맞춰 수정을 하면서 틀을 다시 바꿔야 하는 일이 반복됐고,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커버레터를 다시 다듬어 수정이 용이한 포맷을 만들었다. 전면 수정을 거친 커버레터가 나온 후 본격적으로 일을 찾기 시작했다. 구직이 나의 풀타임 잡(full-time job)이었다. 하루 일과는 채용 공고를 찾는 일로 시작됐다.


공공부문을 알아보며 매트로 밴쿠버 지역의 시청이 우선 목표였다.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시청밖에 없었다. 가까운 곳이면 좋겠지만 이사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각 시청 웹사이트마다 채용란이 있었다. 지원해 볼 만한 행정직 포지션이 간간이 올라왔다.

지원을 위해 온라인 양식을 보던 중 나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신청서에는 해당 시청에 근무하는 친인척의 부서와 이름을 쓰는 란이 정중앙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당연한 자격요건이라는 듯 말이다. 지인찬스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비밀리에 존재한다는 지인찬스가 이곳에서는 비밀이 아니었다. 시청이라는 관공서에서, 지인파워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묻고 있었다. 콧방귀를 뀌며 "로컬도 안 되는 공무원"이라 했던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지인란을 비워둔 채 호기롭게 지원서를 넣었지만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하는 듯 연락이 오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마감날이 한참 지나고 나서 채용이 취소되기까지 다.


공공부문의 채용기회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사기업 지원을 병행했다. 채용이 많지 않으니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용 사이트에 올라온 직무기술서를 꼼꼼히 읽은 후 지원할 곳을 추렸다. 그리고 회사 웹사이트에 들어가 회사의 비전, 조직 구조, 최근 동향 등을 파악했다. 배경조사를 통해 알게 된 회사에 대한 나의 이해를 커버레터에 담아내는 과정은 시간이 걸렸다. 어떨 땐 하루에 한두 개의 지원서를 보내는 게 전부였다. 

구직 노트에 기록해 둔 지원처가 수십 개가 됐지만 서류전형을 통과하기가 몽블랑을 넘는 것만큼 어려웠다.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구직에 진전이 전혀 없는 와중에 저녁 영어 수업을 같이 들었던 친구가 병원 행정직을 소개해줬다. 지인을 통해 채용 소식을 듣고 나에게 지원서를 보내보라고 한 것이다.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준비해 채용 담당자에게 보내며 친구가 알려준 대로 지인의 이름을 이메일에 언급했다. 수십 곳을 지원해도 감감무소식이더니 그 지인의 이름이 힘을 발휘했다. 이틀 만에 인터뷰가 잡혔다.


인터뷰를 하며 채용 담당자는 '추천한 지인'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지원서에 제삼자의 이름을 넣는다는 것이 이곳에서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내가 아는 거라고는 그 사람의 이름뿐이었다. 두리뭉실한 대답이 나가자 구체적으로 관계를 물어왔다. 지인찬스에 어설프게 편승하려는 모양새가 된 나의 인터뷰는 소득 없이 끝이 났다.




로컬 경험이 없네요.


어렵게 인터뷰까지 갔지만 "같이 일해봅시다" 대신 "로컬 경험이 없네요"라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2년간 일했던 레스토랑은 로컬 경험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갖는 건 실패했지만, 어쩌면 '그들 기준'에 부족한 나의 로컬 경험이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걸림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컬 경험이 부족하다는 건 받아들였다. 하지만 경험이 다는 이유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경험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모순처럼 느껴졌다. 


컴퓨터를 열어두고 몇 가지 내용찾아보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목표로 정한 1년 안에 성과를 보려면 수동적이어서는 안 되었다. 이미 몇 달을 소비한 터라 최대한 몸을 움직여 직접 부딪히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차를 몰고 향한 곳은 신규이민자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단체였다. 온라인으로 확인한 건 '자원봉사자 오리엔테이션' 일정이었다. 봉사를 하기 위해서는 신청출 후 인터뷰를 하고 오리엔테이션까지 마쳐야 한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등록까지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는 절차다. 며칠 후로 일정이  오리엔테이션을 꼭 참석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뷰를 해야 했다.


리셉션에문의를 하는 동안 직원이 다른 사람의 호출을 받고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잠시 자리를 비웠다. 직원을 기다리며 리셉션 데스크 주위를 서성이던 중, 다른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말이 잘 통하는 한국 여자분이었다. 이민자 정착서비스를 담당하는 그분이 곧바로 자원봉사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 시간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그 사람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약간의 기대는 하고 왔지만 기대 이상의 빠른 전개였다. 그 자리에서 챙겨간 이력서를 보여주고 인터뷰까지 마친 나는 오리엔테이션 초청자 명단이름을 올렸다.


저녁에 시작한 오리엔테이션에는 약 30명 정도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참석했다. 기관에서 자원봉사자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새로 합류할 자원봉사자들도 각자 본인 소개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이어 기관소개를 비롯해 기관에서 주관하고 있는 행사,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이민자 서비스들이 소개되었다. 자원봉사자의 역할과 지켜야 할 마인드, 온라인 계정에서 봉사활동을 기록하는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오리엔테이션은 끝이 났고 나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로케이션이 많은 기관이라 필요한 곳에 따라 지역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역할의 봉사에 참여했다. 워크숍이나 네트워킹 이벤트 지원, 사무실 업무 지원, 사무실 방문자 지원, 영어가 어려운 한국인들을 위한 통역 지원 등이었다. 그러다 고정으로 토요일에 사무실 지원 업무를 맡게 됐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직접 사무실을 찾는 이민자들을 응대하는 일, 직원들 업무를 보조하는 일, 사무용품이나 안내자료 등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자원봉사는 '로컬로 들어가기 위해 부족한 로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신규 이민자 지원서비스를 하는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뉴커머(new comer)들에게 제공되는 정착 서비스와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을 만나며 다양성을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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