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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Nov 20. 2024

캐나다 고3 학생들과 배우는 English 12

31.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캐나다는 지역에 따라 교육구(School District, SD)를 나누며 구별로 교육을 관할하는 교육청(School Board)이 있다. 각 교육구는 외국인들을 위한 무료 영어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화학, 소셜(Social), 역사, 영어, 불어 등 고등학교 과목을 온오프라인으로 상시 제공한다. 늦게라도 고등학교 학력을 받으려는 성인이나 진학을 원하는 이민자들은 대학에서 필수로 요구하는 고등학교 과정을 과목당 100불 정도의 비용으로 들을 수 있다.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수에 필요한 학점을 받게 되면 등록비는 돌려받는다.


파운데이션(Foundations)을 마치고 내가 들었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s) 11'은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저녁 수업 중 최고 레벨로 나는 더 이상 들을 수 있는 수업이 없었다. English 12(고3 영어)를 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살펴봤지만 당장 가능한 건 자기 주도 방식의 온라인 과정뿐이었다. 기간도 거의 6개월에 달했다. 장기간 혼자 하는 학습 방식에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던 중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수업 하나가 일정에 떴다. 졸업을 앞두고 English 12를 패스하지 못한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을 위해 여름방학 동안 진행되는 집중과정이었다.


학교 사무실로 찾아가 English 12 집중과정에 등록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어쩌면 성인 몇 명은 등록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몇 명을 받아줬다. 나를 포함해 5명으로 모두 이민자였다.


등록을 했던 링크(LINC, 영주권자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 프로그램)는 마트, 은행, 병원, 경찰서 등에서 쓸 수 있는 실생활 영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황을 주고 실전 회화연습을 하는 롤 플레이(role play)가 많았다. 롤 플레이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방식이 아닌 데다 레벨도 평이해 수업이 그다지 재밌거나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6월이 되어 링크를 멈추고 나는 English 12를 시작했다. 실력이 그만그만한 다국적 언어의 엑센트를 가진 사람들과 모여 수업을 받다 현지 고3 학생들과 수업을 들으니 굴러가는 영어가 정신없이 귀에 꽂혔다. 이민자들과 수업을 받을 때는 선생님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던 것과 달리 이곳 고등학생들은 깍듯이 Ms. Derek선생님의 성이 Derek이었다이라고 불렀다. 어색했지만 현지 학교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English 12는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했다. 과제를 받고 올리는 일뿐만 아니라 성적관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집중과정이라는 이름답게 배우는 만큼 과제도 많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성인 학생들에게는 시간이 빠듯할 정도로 해야 할게 많았. 일주일 모두를 투자해도 모자라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3일, 월/수/금 오전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글 한편이 주어졌다. 특정 주제에 대해 다룬 에세이 또는 단편소설이었다. 글을 읽은 후 화두를 찾고 그날까지 에세이를 쓰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아침이 되면 선생님으로부터 그날의 과제가 다.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주말 과제가 시작된다. 오후 3시경 선생님이 한 주간의 과제와 수업에서 다룬 내용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준다. 학생들은 각 질문에 대한 논점을 찾아 에세이를 쓴 후 그날 12시까지 올려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댓글 토론의 시간이다. 다른 학생들이 써서 올린 글을 읽고 리뷰와 함께 나의 의견을 댓글 형식으로 써야 한다. 모든 학생들의 글에 코멘트를 필요는 없지만 3개 이상을 남겨야 한다.

내가 써서 올린 글, 내 글에 달린 댓글에 대한 나의 회답, 다른 학생들의 글에 남긴 나의 코멘트들이 모두 점수로 매겨졌다. 댓글을 많이 받기 위해 참신한 논쟁을 만들고, 좋은 점수를 위해 논리적인 글을 쓰려는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점수가 공개되는 탓에 중반이 지나자 현지 아이들의 눈치보기 작전도 시작되었다. 재수강을 해도 패스를 못할 것 같은 아이들이 물밑접촉을 해왔다. 미안하다 아가들아, 공부는 스스로 해야지!


이와 별개로 과정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은 『The Jade Peony』라는 책을 학생들에게 한 권씩 나눠줬다. Final 시험이 책이었다. 매일 주어진 과제를 하며 시간을 쪼개 책을 읽었다.


좋은 문장 표현이 있어서 찍어두었던 The Jade Peony


중국계 캐네디언 작가 웨이슨 초이(Wayson Choy)의 작품인 『The Jade Peony』는 진주만 공격이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차이나타운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밴쿠버의 이면>에서 소개한, 지금은 홈리스에게 거리를 내어준 그곳이 차이나타운과 이어진다. 소설은 바로 그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는 곳이 배경으로 나오니 장면을 상상하며 스토리를 따라갔다.



책을 읽고 해야 할 개별 과제도 있었다. Final 시험 즈음이 되어 선생님은 과제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주며 이전 수업에서 학생들이 만든 샘플을 보여주었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도 있고 사진 작업, 영상 작업, 이미지 보드 등 각자 방식을 정해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책의 스토리를 근간으로 하되 개인의 견해나 상상력을 추가로 담아야 했다. 아이템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피치 울렁증이 있어 피티는 우선적으로 제외했다. 과제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홈리스 텐트촌을 뚫고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상 편집에도 나는 문외한이었다. 그나마 도전해 볼 만한 것이 카툰북이라 생각했다.


과제를 정한 후 책을 다시 훑으며 스토리라인을 만들었지만 어떤 콘셉트로 만화를 그릴지 막막했다. 과제 마감날이 임박할 때까지 나는 그림에 대한 방향을 잡지 못했다. 머리만 쥐어뜯은 채 시간을 보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이틀 전부터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스토리라인에 따라 그림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페이지 구성을 먼저 한 후 연필로 밑그림을 그렸다. 사인펜으로 덧입혀 그림을 완성하고 등장인물마다 포인트를 정해 까맣게 색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된 미니 카툰북


완성하고 나니 제법 그럴듯했다. 내 과제에 선생님과 학생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발표를 마치고 모두 과제를 돌려받았지만 선생님은 나의 '작품'을 샘플로 보관하겠다고 하셨다.


아쉬움에 영상으로 남겨둔 완성된 미니 카툰북 (f. 에리카의 손)


Final 시험은 모든 학생들이 교실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책과 관련한 개의 글을 쓰는 것이었다. 과제와 다르게 영어사전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 건 또 다른 압박이었다. Final 시험이 점수를 조금 떨어트렸지만 Top 2의 성적을 받았다. 나는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Provincial Exam은 보지 않았다.  달간 온전히 집중한 English 12를 그렇게 마치고 교육부(Ministry of Education)로부터 성적표에 해당하는 평가서를 받았다.


Provincial Exam은 주에서 주관하는 영어시험으로 대학에 필요한 English 12는 Provincial Exam을 본 후 수업 성적을 포함한 통합된 성적을 받아야 하며 두 가지 모두 통과해야 한다.




English 12를 공부하며 여름이 깊어지자 집 근처의 시원한 별다방은 나의 공부방이 되었다. 창가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던 나를 발견한 엘리샤가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며 카페로 들어왔다. 우리 집에서 별다방까지 도보 5분, 엘리샤의 집도 반대방향으로 5분 거리에 있었다.


"공부 잘 돼? 대단해 English 12를 하고. 어렵지 않아?"

"완전 빡셔! 리암이한테 SOS를 치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냐. 고등학교 과정이라 다르긴 달라."

"손목은 좀 어때?"

"약을 아무리 먹어도 안 듣더니 역시 일을 쉬는 게 답이었어. 여전히 시큰거리기는 하는데 이제 화장실 뒤처리는 문제없어."

"ㅋㅋ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커피 애호가인 우리가 수많은 별다방 중 이곳을 특히나 좋아하는 이유는 위치도 있지만 늘 한결같은 커피맛 때문이다. 충분히 뜨거운 온도와 진한 향 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이곳 아메리카노는 진리다.


"난 지금 실업급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덕분에 준비할 수 있는 1년이라는 시간이 생겼어. 내년 이맘때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나에게 밥을 사주고 있겠지!"


그날을 생각하며 행복한 상상에 잠겼다.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좋아하는 몇 가지 메뉴가 머리를 스쳤다.


"난 내년에 뭘 하고 있을까? 사실, 블리야 일 그만두고 가게가 많이 한가해. 매일같이 드나들던 단골손님들이 거의 다 떨어졌어. 다 블리야 손님들이었던 거지. 엄마는 이제라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손님들에게 차갑고. 너도 알지? 우리 엄마 주특기가 정색하기라는 거."

"거긴 손님들에게 특별히 해줄 것도 없는데 친절하기만 하면 꾸준할 텐데."
"내 말이 그 말이야.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엘리샤는 부모님과 끝없는 전쟁 중이었다. 모진 말을 받아내는 건 가족도 피해 갈 수 없었, 급기야 연을 끊어내 버린 동생의 남편에 대해 엘리샤는 첫째로서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에 박한 부모님은 엘리샤에게도 신뢰를 주지 않았다. 가게를 맡기는 듯하면서 매번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엘리샤가 짠 직원 근무스케줄도 뒤집기 일수였다.

손님이 절반 이상 떨어진 후 가게를 살리기 위한 엘리샤의 노력은 아낄 수 있는 비용을 줄여 수익을 조금이라도 올려보자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다 주방에 실력 좋은 경력자가 들어왔다. 재료마다 손질과 관리법을 잘 알고 있는 그 사람덕에 재료 손실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손이 빠르고 음식은 깔끔하고 맛있었다. 몇 주동안 파트타임으로 지켜본 후 풀타임 고용을 했지만 부모님은 엘리샤의 판단과 결정을 믿어주지 않았다. 고용을 깬 것에 대한 사과를 수차례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좌절을 느꼈다.


"가게 빨리 물려받아야 한다고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처음엔 네가 절실히 필요해서 약속을 하셨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흔들리는 게 사람 마음이야. 미안하지만 내가 아는 너의 부모님, 가게에서 손 놓을 분들 절대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나 가게 일 그만둘까 봐. 치과 여러 곳에서 계속 오퍼가 오는데 좋은 제안도 있어. 치과 일이 정말 하고 싶어."

"난 적극 찬성이야. 리암이 이제 다 컸어. 혼자서도 앞가림 잘하고 있고 가게 없어도 남은 뒷바라지 잘할 수 있어. 엘리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치과로 돌아가."


엘리샤가 가게 일을 그만 둘 결심을 했지만 부모님은 놓아주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는, 끈적이는 혈연 굴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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