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시에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쉴 새 없이 부재중 전화 알림과 문자 메시지, 음성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난리가 났다. 협회 실장과 사업팀장이 수십 차례 전화와 문자를 해 왔다. 회사 경영기획실장의 연락도 있다. 늦은 시간에 어느새 회사에까지 연락이 간 모양이다. 회사의 연락은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사유서라도 쓰라면 쓸 각오로 경영기획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어 블리야 대리. 어디야?"
"협회 근처에서 맥주 한잔씩 하고 있어요."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통화가 끝나자마자 사업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이미 전화가 켜 있는 걸 아는 상황에서 안 받을 수가 없다.
"대리님! 지금 어디 계세요?"
분당에 살고 있는 사업팀장은 11시가 다 되었는데 오겠다고 한다. 곧이어 또 전화가 온다. 이번엔 협회 실장이다.
"네, 실장님..."
"아이고 블리야 대리~ 어디야?"
행사 따위는 잊고 달려보자던 패기는 연이어 쏟아진 현실의 찬물 세례를 받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우린 회사 경영기획실장, 협회 실장, 사업팀장, 세명의 어른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다들 이 늦은 시간에 달려오는 걸 보면 분명 내가 큰일을 벌이긴 벌인 거다.
나를 업계에 추천해 주신 교수님의 우려와 달리 난 누구보다 악착같이 일을 해내고 있다. 체력에 대한 우려 따윈 말 그대로 기우가 되었다. 나 또한 이런 에너지가 어디에 숨어있다 나오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이 일에 갖고 있는 열정만큼은 활화산 못지않게 뜨겁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지난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컨벤션기획사로서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비록 인턴 경쟁에서 실패한 후 '대타'로 정직원이 되어 출발했지만 이후 경력 6개월 만에 대리 승진을 했다. 그리고 곧 행사 예산을 짜고 용역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전 팀장의 배려였다. 이젠 몇억 정도의 예산쯤은 혼자서도 거뜬히 짤 수 있을 만큼 지식과 경험이 쌓였다.
나의 영어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건 내 발목을 잡기보다 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영어 잘하는 직원들이 계속해서 해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동안 나는 그 외의 모든 업무를 배웠다. 그래서 행사 전체를 보는 시야가 빨리 생겼고 실행 책임을 일찍부터 맡아왔다.
컨벤션 용역 계약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짠다는 건 '갑'과 '을'의 역할을 안다는 뜻이다. 계약서에서 명시하는 '을'의귀책사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행사를 망쳤을 때 '을'이 유일하게 구제받을 수 있는 건 '테러' 또는 천둥, 벼락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현재 내 위에 팀장이 있기는 하지만 파견팀의 리더는 나다. 99%의 커뮤니케이션을 내가 협회와 하고 있고 회사를 대표한 의사결정을 직접 한다. 이번일이 '을' 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무지하지도 책임감이 없지도 않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일로 내가 무책임하게 행사를 포기하지도 않을 거라는 거다.
'내가 심했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잘못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직원 둘은 잔뜩 겁을 먹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다.
"괜찮아. 책임질 일 있으면 내가 책임져. 어깨 펴."
집이 가까운 회사 경영기획실장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뒤늦게 지방 회의에서 사무실로 돌아온 사업팀장이 얘기를 전해 듣고 나와 직원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핸드폰이 모두 꺼져있자 급한 마음에 회사 경영기획실장에게 연락을 한 상황이었다.
경영기획실장은 우리의 마음이 어땠을지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회사의 입장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우리를 달래기 위해 애쓴다. '갑을관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건 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금 후 협회 실장이 총알택시를 타고 용인에서 날아왔다. 곧 사업팀장도 합류를 했다. 이렇게 우리 6명은 밤 12시 선릉역 호프집에서 뜻하지 않은 비상 회동을 하게 됐다.
맥주 한잔씩을 들이켠 후 협회의 행사 담당인 사업팀장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시작한다.
"제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팀장님 잘못 아닙니다."
"여기 세분, 파견 나와서 정말 열심히 해 주고 계시는데 이런 일 겪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경영기획실장이 나서서 한마디를 거든다.
"팀장님, 이 친구들 그때는 화가 났겠지만 다시 열심히 잘할 겁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실장님.."
.
.
.
"블리야 대리님, 여기 정리하고 직원들이랑 회사로 들어가세요. 이런 환경에서 파견을 유지하게 하는 건 제 욕심인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업팀장의 제안으로 우린 모두 말이 없어졌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닌데 파견 두 달 만에, 행사 준비는 이제 시작인데, 막상 회사로 들어가라는 얘기를 들으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안다. 사업팀장과 내가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라는 걸. 껄끄러운 분위기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인 것도 안다. 누구처럼 갑을관계를 내세워 갑질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예의와 배려가 있다. 갑의 품격이 있다. 이런 꼼수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머리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이건 진심이다.
우리가 철수를 한다면 두 분은 어떻게든 우리를 보내줄 거다. 후폭풍은 고스란히 사업팀장과 실장이 떠안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실장님, 팀장님, 저희 한 템포 쉬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주말도 없이 일하느라 잠이 너무 부족한데 내일 잠 좀 채우고 협회로 나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전화 안 할게요."
그날 밤 협회 실장과 사업팀장은 '을의 반란'에 적극 협조했다. 우리를 노래방으로 안내해 현란한 밤을 선사했다. '심신'의 총알이 '그! 대! 여~ 오! 직! 하나뿐인 그대~~'라는 노래가사와 함께 수도 없이 발사됐다. 적당히 맥주도 마시고 머리에 형형색색 가발을 하나씩 뒤집어쓰고 신나게 쏟아대고 나니 한바탕 폭풍이 머물다 떠나간 듯 마음이 고요해졌다.
다음날 우린 밀린 잠을 자두고 점심 즈음 협회로 출근을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회원관리팀장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파티션 아래로 몸을 낮춘다. 반송된 브로셔들은 모두 봉투와 분리된 채 한편에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