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풍국 블리야 Apr 06. 2024

당신이 갑 '질' 을 하는 건 갑이 아니라는 증거다

04. 갑에도 레벨이 있다

회사를 잘린 덕분에 한국디자인진흥원과 2003 세계베스트디자인전을 함께 하며 나는 전시행사의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유례없는 명품 전시라는 호평 기사가 쏟아지면서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은 매일 북새통을 이뤘다. 전시가 진행되는 5일 동안 매일 관람객 신기록을 찍었다.


성황리에 행사가 끝나고 결과보고서 작성을 하고 있던 중 한 컨벤션대행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당시 업계에 자금력이 탄탄한 회사로 알려져 있던 이 회사는 내 이전 팀장과 대학원 동기였던 분이 팀장을 맡고 있던 회사였다. 그 팀장이 팀원들을 데리고 나가 독립을 하면서 새 팀장 체제가 됐다. 돈 받고 써 줄 정도로 제안서의 고수라는 그분의 흔적들이 궁금하기도 했다.


전시, 여행, 컨벤션 사업부가 있고 경영기획팀이 따로 있던 회사의 팀 구성도 좋았고 제시한 조건도 괜찮았다. 결과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한 후 2004년 1월, 나는 대치동에 있는 회사에 입사를 했다.


입사 후 첫 프로젝트로 10월에 있는 정부 시상식의 실행 책임을 맡게 나는 8개월간 파견을 나가게 됐다. 선릉역에 위치한 벤처협회였다. 첫 행사부터 파견이라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회사에서 멀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협회의 행사 담당은 사업팀장과 직속 실장이었다. 사업팀장은 전년도 행사를 담당했던 회사를 차려 나간 그 팀장과 같이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우리 회사가 행사를 수주하게 됐다. 컨벤션 업계에도 정치는 만연하다.


그게 못마땅했던 사업팀장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불이익을 떠안고 행사를 준비하게 됐지만 나는 두 명의 직원을 데리고 파견을 나가 정치적인 부분은 애써 모른 척 한 채 묵묵히 내 할 일을 했다. 그해 협회는 '새로운 도약' 을 모토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어 했다. 매년 해오던 시상식을 중심으로 자잘한 부대행사들을 만들어냈다. 구체화할 아이디어를 내고 현장에서 실현시킬 사람은 사업팀장과 나였다.


처음부터 나와 거리를 두던 사업팀장은 내가 내는 의견들이 설득력이 있고 현실성이 있자 나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화두를 던졌을 때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얼마간의 시간을 갖는다는 걸 파악한 팀장은 내가 말이 없어지면 조용히 앉아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의견을 주기 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목적과 타당성, 실현 가능성, 그리고 예산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팀장과 실장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 처음부터 야근이 연속되던 우리는 협회 근처에 숙소를 하나 잡고 새벽에 들어가 쪽잠을 자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행사의 기본 윤곽이 잡히고 사전 홍보용으로 쓸 브로셔를 제작했다. 업체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사전 브로셔 제작과 발송이 중요한 시작이었다. 수상자 선정 심사를 위해서는 심사 대상자가 있어야 하고 많은 기업이 참여를 해 줘야 정부 시상식의 공신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업팀장의 협조 요청으로 회원관리팀은 브로셔를 발송할 회원사의 명단을 제공했다. 협회에 속한 회원사의 규모는 수천 개였다. 브로셔가 인쇄되어 나오고 모든 회원사에게 우편 발송을 마쳤다. 일주일 가량의 시간이 지나자 브로셔들이 반송되어 오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다발씩 반송된 브로셔들이 사무실 한편에 쌓이기 시작했다.


사업팀장과 실장이 지방 회의로 자리를 비운 어느 날 저녁. 반송되어 쌓여있는 브로셔를 협회 부회장이 사무실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회원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회원관리팀장!"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눈치를 살피며 한쪽에 찌그러져 있던 회원관리팀장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쭈뼛쭈뼛 부회장에게 걸어 나온다.


"회원사 관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이게 지금 장난이야? 왜 이렇게 반송이 돼서 오는 거야?"

"그게 저.."

"당신 하는 일이 뭐야? 회원사 주소 관리도 제대로 못해?"

"......"


회원관리팀장이 침묵하기로 결정한 듯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다음 화살은 나를 향했다.


"이봐 블리야 대리! 당신, 우편물 제대로 보낸 거 맞아?"

"네, 주신 명단대로 보냈고 보낸 수량도 맞습니다."


화를 주체할 수 없던 부회장은 손에 쥐고 있던 반송된 브로셔로 회원관리팀장에게 삿대짓을 해가며 다시 한번 소리를 높인다.


"이봐 회원관리팀장! 뭐라고 말을 해봐!"

"그게 저.. 아마.. 비활동 회원사 명단까지 포함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희는 이게 브로셔 발송용인지 몰랐습니다."


말문이 막힌 부회장은 들고 있던 브로셔를 바닥에 내 던지며,

 

"이거 다 뜯어! 다 뜯어서 재사용해! 이게 예산이 얼만 줄이나 알아?"

"네 알겠습니다."


비겁한 회원관리팀장의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나는 기가 찼다. 사업팀장이 부재중인 관계로 맞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밥줄이 끊길까 봐 말 같지도 않은 변명으로 둘러대는 회원관리팀장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조직 내에서도 갑과 을이 존재함을 보았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내 할 일을 했다. 눈치를 보던 우리 직원 한 명이 나에게 메신저를 보내온다.


'대리님.. 저거 우리가 뜯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놔둬. 우리가 할일 아니야.'


한바탕 난리로 사무실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퇴근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일하고 있던 협회 직원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부회장이 퇴근을 하자 참아왔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한쪽에서 브로셔를 뜯고 있던 회원관리팀장이 갑자기 발악을 한다.


"아이씨... 야! 브로셔를 보낼 거였으면 비회원사 명단을 빼고 달라고 해야 될 거 아냐!"


저 인간이 돌았나.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 동료들과 팀원들이 다 보고 있는데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이런 무식한 짓을 하나. 나는 이성을 잃은 가여운 영혼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저는 비회원사가 뭔지 몰라요. 이건 사업팀장님의 요청이 있었던 거고 저희가 행사 준비 때문에 여기에 파견 나와 있는 걸 모르시지 않잖아요."

"에이.... 씨.. 발..."


회원관리팀장은 쌓여있던 반송된 브로셔들을 집어 들어 내 앞으로 내던진다. 우리 직원들 뿐만 아니라 협회 직원들 모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야이씨.. 이거 니가 다 처리해!"

"어디서 계속 반말이세요. 회원사 명단 관리는 '팀장님 일' 이잖아요."

"너 따박따박 말대답할 거야? 하라면 해!"

"못합니다!"

"야! 하라면 해!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야!"


보다 못한 협회의 몇몇 직원들 입에서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이미 선을 넘은 회원관리팀장을 저지하지 않는다.


"갑이요? 갑 '질' 을 하고 싶은 거겠죠."


그 자리에서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짐을 챙기라고 했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을' 이라는 소리를 듣고 기가 죽어 머뭇거리는 직원들을 보며,


"뭐 해? 짐 챙겨!"


주섬주섬 챙긴 가방을 들고 나오는데 협회 직원 하나가 나를 붙잡으며 사정한다.


"대리님.. 참으세요.. 팀장님이 너무 하셨어요. 죄송해요 대리님.."


협회 직원의 만류에도 나는 그렇게 직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핸드폰 끈다."


한 달 넘게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쪽잠을 자 온 직원들을 데리고 나는 호프집에 갔다.


"행사는 잊어버리자. 오늘은 그냥 맥주나 마시자~~"


이전 03화 사장이 나를 잘랐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