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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Apr 21. 2024

종이 따귀를 맞았다

06. 잔치는 끝났다

국무총리의 시상식 임석이 확정됐다. 이로서 우리가 할 일이 두 배 이상 많아졌다. 비표 업무부터, VIP 의전과 안전, 참가자 안전, 시스템 보강, 현장 시설 안전 등 해야 할 일이 추가됐다. VIP를 초대한 잔치에 사람이 없으면 안 되니 참가자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추가 예산 확보가 급했던 협회는 몇몇 기업들로부터 협찬금을 받았다. 협찬사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해 줄 건인지를 두고 협회 내부 논의가 있었고 리셉션 행사에서 협찬사를 소개하는 방안이 거론됐다. 구체적인 협찬 내용을 공개하기 부담스러워한 협회가 직접 리셉션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확정된 협찬사를 무대 디자인과 장치 장식물, 인쇄물에 정해진 순서대로 넣어 제작을 하고, 시상식을 비롯한 나머지 부대행사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가장 공을 들였던 부대행사는 성공한 벤처 기업가와 청년 창업가를 매칭해 주는 멘토-멘티 프로그램이었다. 취지 자체도 좋지만 현장에서 잘 연출이 되면 더 없는 홍보거리가 될 것이다. 사업팀장의 걱정과 달리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행사의 그림이 머릿속에 있었던 나는 단 번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국무총리 임석으로 빠듯해진 예산을 감안해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파워포인트 오프닝 영상을 시작에 넣었다. '갑의 품격'을 갖춘 분께 이 정도쯤은 해줄 수 있는 재량이 있다.


시나리오를 받아 본 사업팀장은 한걸음에 나에게 왔다. 190cm 장신의 그 잘생긴 얼굴에 하회탈이 걸렸다. 한참 동안 박수를 쳐준 후 양쪽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쌍따봉을 날려준다. 이 시나리오를 계기로 사업팀장은 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숨기지 않았다. 외근 중에 요청받은 급하게 보낼 국무총리실 보고자료까지 검토 없이 직접 보내도록 했다.


추석 연휴가 걸리면서 외부 커뮤니케이션과 제작물 발주를 1순위로 뒀다. 마무리가 안된 내부적인 일들은 연휴기간 동안 정리해 나갔다. 연휴 이후 행사까지 남은 건 단 며칠. 현장에 투입될 회사의 모든 직원과 진행요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이 진행됐다. 행사장 설치, 참가자 등록과 수상자 관리, VIP 의전을 맡은 직원들과는 장시간에 거쳐 점검회의를 했다.


근 두 달 가까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추석 연휴까지 반납하며 사무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준비한 행사 당일이 왔다. 코엑스 오디토리움은 천명이 넘는 참가자들로 북적거렸다. 미리 도착한 수상자들이 한쪽에 마련된 수상자석에 순서대로 앉아 기다린다. 리허설 예정시간에 맞춰 도착한 행정안전부 수훈팀에서 국무총리께 직접 상을 받을 수상자들과 리허설을 한다.


사회자와 현장 연출팀, 의전팀, 협회 담당자들과 최종 확인할 사항들을 점검하고 나니 행사 시작 전까지 모든 수상자의 동선 연습이 불가능하다. 마음이 초조해지지만 이럴 때 내가 불안해하면 행사를 망친다.


집중해 블리야!


연출팀이 진행을 맡아 리허설이 시작된 가운데 수상자들에게 공지할 사항들을 전달한다. 목소리가 원래 크지 않은 나는 최대한 성량을 끌어올려 설명을 하지만 시끄러운 음향에 묻혀 여기저기서 안 들린다고 외쳐댄다. 몇 그룹만 신속히 리허설을 진행한다. 미리 연습을 해 둔 직원의 안내로 수상자들이 줄을 서 무대 위로 오르고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동선을 배운다. 그리고 다음에 무대 위로 올라갈 다른 수상자 그룹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반대편으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온다. 무대 위로 올라간 사람들의 동선과 움직임을 따라가며 목이 잠기도록 설명만 해 준채 총리께서 1층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들려온다.


큐사인을 받은 사회자가 오프닝 멘트를 한다. 국무총리의 입장 멘트와 BGM까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국무총리께서 착석하신 후 오프닝 영상이 시작된다. 시상식 순서가 오기 전 다시 한번 수상자들에게 다가가 동선을 주지해 준다. 한 그룹 한 그룹 올라가 상을 받고 내려오는데 모두 실수 없이 잘 따라 움직여 준다. 유명 아나운서답게 현장 상황에 맞춰 애드리브가 잘 들어간다. 시상식이 깔끔하게 끝이 났다. 협회 임원진과 실장, 사업팀장이 환한 얼굴로 수고했다며 어깨를 토닥여 준다.


이후 오디토리움 로비에서 수상자를 축하해 주는 리셉션 행사가 시작됐다. 협회 임원을 비롯해 회원사 대표들과 외부에서 초청되어 온 기관장 등 수백 명이 리셉션에 참석했다. 현악 연주와 함께 준비한 칵테일과 핑거 푸드를 나누며 참석자들이 환담을 나눈다. 사업팀장과 실장은 다음날 진행될 부대행사 준비로 리셉션을 나에게 맡긴 채 자리를 떠났다.


시나리오를 받아 들고 사회자와 전체 식순을 확인한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내 큐사인에 맞춰 리셉션이 시작됐다. 무대 아래에 자리 잡은 나는 진행상황을 보며 사회자에게 사인을 계속 넣어준다. 오프닝이 시작되고 협회장을 비롯해 몇몇 초청 기관장들의 인사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공연 소개가 이어질 무렵,


"이봐! 블리야 대리!"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공연팀 소개 전 조용해진 틈을 타 멀리 서 있던 협회 부회장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무대 쪽으로 다가온다. 쩌렁쩌렁한 날카로운 부회장의 목소리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부회장에게 쏠렸다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나를 향해 움직인다.


"당신 일을 똑바로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내 큐사인을 기다리던 사회자도, 무대 뒤에서 소개를 기다리던 공연팀도, 참석자들이 이어가던 환담도 모두 멈춘 채 현장은 정적이 흐른다.


"협찬사 소개 어디 갔어? 어? 돈을 얼마를 받았는데 협찬사 소개를 안 해!!!!"


부회장은 현장에 있는 협찬사들 보란 듯이, 당신이 지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행사 직원의 실수'로 협찬사 소개가 되지 않았다는 걸 어필하려는 듯 더욱 소리를 높여 고성을 지른다.


"당신 돌았어? 당신 제정신이야??"


그리고는 내 손에 들려있던 리셉션 시나리오를 낚아채 돌돌 말아 내 얼굴 위로 내려친다. 종이 따귀를 맞았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한껏 움켜쥐었던 시나리오를 내 얼굴에 집어던진다. 얼굴을 맞고 튀어나간 구겨진 시나리오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수백 개의 눈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 모두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사회자도, 현장을 지켜본 우리 직원들도 충격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다.


저 많은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가운데 갑이 휘두른 칼날에 베인 얼굴이 쓰라리다. 심장에서는 용암 같은 피가 솟구쳐 오른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말문이 막히고 뇌가 생각을 멈췄다. 시간도 이렇게 멈췄다.


행사가 끊겼다. 손님들을 초대한 집주인의 난동으로 행사장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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