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 릿지(Maple Ridge)로 가게 되면서다운타운을 떠나는 아쉬움보다 작은 마을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정을 느끼며 그들의 소박한 삶을 맛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에들떴다. 캐나다스러운 이름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코퀴틀람(Coquitlam)에서도 여전히 1시간이 넘게 걸리기는 했지만 버스 한 번에 메이플 릿지를 갈 수 있는 건 큰 차이였다. 출퇴근은 오래 걸리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늘 회사 가까이 살았었다. 이 넓은 캐나다에서 차가 없으니 한 시간 거리 출퇴근은 감내해야 했다.
코퀴틀람에서 메이플 릿지를 가기 위해서는 핏 리버 브리지(Pitt River Bridge)를 건넌다. 다리 위를 지날 때 핏 리버 끝으로 펼쳐지는골든 이어스(Golden Ears)의 풍광은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하다. 버스가 다리에 진입할 때가 오면 머리를 빼꼼히 빼고 황홀경에 빠질 준비를 한다. 오늘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 '아저씨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가요..'를 속으로 되뇌며 시선은 풍경 속에 묶어둔다.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진한 나무 냄새가 올라온다.강에 띄워진 나무가 익어가는 냄새다.
고층 콘도가 아닌 이상 나무로 집을 짓는 캐나다에서는 통나무를 사진처럼 강에 띄워두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통나무를 물에 저장해 두면 얼룩, 갈라짐, 곰팡이와 곤충에 의한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물에 띄운 채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하천의 어류 서식지를 개선하기 위한 기술로도 활용된다.
골든 이어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버스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핏 매도우스(Pitt Meadows)라는 마을을 굽이굽이 지난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이 마을은 간혹 보이는 식당도 마트도 한산하지만 늘 문을 열어두고 사람을 기다린다. 언제까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스쳐가는 이 작은 마을의 한적함과고요한 풍경을 보는 건 황홀한 골든 이어스를 보는 것과 다른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 사이 가게 일은 익숙해졌고 속도도 붙었다. 나는 계속 오후 쉬프트를 받았다. 보통 1시 또는 1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4시까지는 오전 쉬프트를 하는 로컬 아이와 같이 일을 하고 4시 이후에는 사모님과 함께 했다. 가게는 꾸준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바쁘지는 않았다. 대부분 로컬 손님들이었고 가족, 근처에서 일하는 직장인, 그리고 학생 등 손님층이 다양했다. 아시안계 손님들도 있었지만 한국인은 어쩌다 한두 명 오는 정도였다.
그곳은 손님이 좋아하는 재료와 소스를 볼에 담고 나면 본인이 앉을 테이블 번호와 이름, 그리고 특별한 요구사항을 포스트잍에 적어 볼에 붙여놓는다. 예를 들면 야채를 아삭하게 살짝만 볶아달라, 고기는 웰던으로 해달라, 밥 대신 스프링롤을 달라, 반대로 스프링롤 대신 밥을 더 달라, 스프링롤이나 밥에 소스를 뿌리지 말아 달라 혹은 많이 뿌려 달라 등이다.
일이 익숙해지면서 손님들의 이름과 취향이 외워졌다. 손님마다 어떤 스타일로 요리를 해주는 걸 좋아하는지, 시원한 물을 마시는지 따뜻한 차를 마시는지, 음료수는 어떤 걸 마시는지, 얼음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젓가락을 쓰는지 포크를 쓰는지 등이다. 잊어버리고 말을 안 해도 먼저 챙겨주고 음료도 알아서 챙겨주니 손님들과 점점 유대감이 생긴다.
워낙 아이들을 예뻐하는 것도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오는 손님들은 안전문제 때문에 더 신경을 써서 챙긴다. 부끄러워 등 뒤로 숨기 바빴던 아이들이 조금씩 웃음을 지어 보이고 눈이 마주치면 작은 손을 흔든다. 엄마 아빠 품에 안겨 들어온 아기가 내려놓으면 두 팔을 벌리고 아장아장 걸어와 안긴다.
보석 이름을 하나씩 나눠가진 일란성쌍둥이 꼬마손님. 특징을 파악해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시작하고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자 수줍음 많은 쌍둥이 꼬마 숙녀들은 올 때마다 내 귀를 하나씩 차지하고 비밀 얘기를 풀어놓기에 바쁘다. 엄마 아빠에겐 말하면 안 된다는 약속도 받아둔다.
어린 학생들은 내가 자기들 또래인 줄 알고 장난을 걸어오기도 한다. 늘 같이 다니는 친구들 중에 어쩌다 누가 못 오게 되면 굳이 자기들끼리 하는 영상 통화에 나를 바꿔달라 하고 인사를 한다. 계산할 때 머뭇거리는 학생들을 보면 부모님이 주신 용돈은 아껴 쓰고 나중에 취직하면 직접 번 돈으로 팁을 내라고 말해준다. 부담을 덜어낸학생들이제집처럼 드나든다.
바쁘지 않은 시간에 혼자 와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식사를 즐기는 혼밥족도 있다. 항상 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이 손님들은 볼을 만드는 동안 인사를 나누고 필요한 세팅만 해주고 나면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다.
어르신들은 정이 많으시다. 꼭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처럼 나를 대하신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고 꼭 안부를 먼저 묻는다. 식사를 하면서 낱말 맞추기도 하고 한편에 놓인 신문을 보기도 한다. 식사를 하고 떠날 때면 "오늘도 네 미소 덕에 밥 잘 먹고 간다."며 넉넉히 팁을 두고 가신다.
맥 라이언을 닮은 여자손님.어쩌다 한 번씩 보는 예쁜 그 얼굴은 늘그늘에 가려져 있다.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힘든 이혼을 겪고 있다고 했다. 작은 위로의 말을 전했는데 내 앞에서펑펑 울어버린다. 순간 당황했지만 작은 위로조차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워 살포시 안아줬다. 그 후장미꽃 한 송이를 사들고 온맥 라이언은 단골이 되었다.
손님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비롯해 누가 누구의가족이고 친척인지 알게 되면서 점점 대화거리가 많아지자 하루하루 일하는 게 즐겁다. 마치 나도 스타스 할로우*의 일원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