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빚은 얼음궁전, 시가 춤추는 숲 / 왕지네고사리

(68화) 광휘의 왈츠, 여왕의 마음을 훔치다

by 로데우스

산이 주는 자유
숲이 주는 낭만
내가 걷는 낭만의 발자국



왕지네고사리가 사는 세상


첫인상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눈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여러 번 곱씹어야 비로소 스며드는 이미지가 있다. 숲 속의 크리스털이라 불리는 '흰비늘고사리'를 발견한 것이 후자의 기쁨이라면, 왕지네고사리가 펼쳐놓은 '얼음궁전'은 전자의 경이로움이었다. 사람의 눈은 보고 싶은 것을 담고, 그때의 기분은 풍경에 색을 입히기 때문일까. 길 없는 숲의 위험과 정체 모를 기대가 뒤엉킨 채,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굴리는 시간이야말로 탐방의 진정한 묘미다. 그 길 끝에서 나와 꼭 닮은 인연을 만나길 고대하며 발을 내디뎠다.


천아계곡은 제주 단풍의 명소로 유명하지만, 꽃을 찾는 이들에겐 야생화의 품이며, 나에게는 진귀한 양치식물을 만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보물창고다. 어떤 초록을 마주하게 될까. 팽팽한 기대감이 차오르는 봄날의 녹음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얼음궁전'을 마주한 순간, 눈앞에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흰비늘고사리가 이렇게나 많았던가?' 홀린 듯 다가가 반짝이는 비늘을 자세히 살피니, 그것은 흰 비늘이 아니었다. 이름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혹여 이 얼음궁전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면 어쩌나 하는 안타까움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왕지네고사리 새순들이 만드는 로마의 기둥과 아칸투스

숲의 신전

천아 숲 깊은 그늘 로마의 기둥 서고
수정빛 비늘마다 얼음궁전 깨어나니
진흙 위 춤추는 여왕, 시 한 송이 피우네

로마의 기둥 머리 아칸투스 살아나고
돌 속에 갇힌 문양 새순 되어 춤을 추니
찬란한 그늘의 광희(光輝), 숲을 빚는 마법이라



그때, 오전의 햇살이 은빛 파도를 타고 숲 사이로 쏟아져 내려 얼음궁전을 비추었다. 찰나의 순간, 동화 속의 궁전을 발견했다는 착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수정처럼 투명한 햇빛이 얼음 기둥을 뚫고 들어와 나를 꿈길로 안내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잎사귀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환상의 무대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얼떨떨함과 황홀경이 교차하는 사이, 아찔한 광휘(光輝)가 나를 휩쓸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의 생각이 어디쯤 머무는지조차 잊었다. 오직 이 환상적인 공연에 취하는 것만이 자연에 대한 예의인 듯싶어, 눈앞의 반짝임에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비밀의 문이 열렸다. 나는 숲 속의 보석을 훔치려는 도둑이 되어 고민에 빠졌다. '이 얼음궁전을 어떻게 통째로 가져갈까? 아니지, 이곳엔 분명 눈의 여왕이 살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궁전보다는 그녀의 마음을 훔쳐야겠어.' 자문을 구하려 안데르센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깊은 계곡은 묵묵부답이다. 여왕의 마음을 얻을 궁리에 몰두하던 바로 그 순간, 구름이 햇빛을 가렸다. 아, 나의 얼음궁전이 흐릿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숲속에서 본 환희의 순간들


현실로 돌아온 눈앞에는 누런 비늘을 두른 고사리 숲이 서 있었다. 훗날 알게 된 그 이름은 왕지네고사리(Dryopteris monticola). 과연 너는 숲 속의 여왕이었다. 라틴어 학명인 'monticola'는 산(monti)과 거주자(cola)가 합쳐진 이름이니, 여기에 '왕'이라는 접두사까지 붙어 진정한 '산에 사는 여왕'이 된 셈이다. 산을 사랑하는 내가 이 얼음궁전을 만난 건 우연이 빚어낸 필연이었으리라. 첫눈에 반한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하인리히 하러는 저서 <티벳에서의 7년>에서 "산은 나를 겸허하게 만들었고, 그곳에서 진정한 자유를 배웠다"라고 말했다. 산이 주는 자유와 숲이 건네는 낭만 속에서, 오늘도 내가 내딛는 발걸음은 오롯이 '낭만의 발자국'으로 남는다.



왕지네고사리 포자낭군은 여왕들의 눈동자인가?


상상의 숲, 눈의 여왕에게 쓰는 편지


숲의 침묵은 행간이 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은 쉼표가 된다


햇살이 은빛 창을 던져
왕지네고사리의 비늘을 깨울 때
누런 껍질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딱딱한 식물도감이 아니라
안데르센이 미처 쓰지 못한 겨울의 뒷부분


길 없는 곳을 걷는 자만이
얼음궁전의 문턱을 넘고
현실의 눈을 감는 자만이
비로소 상상의 광휘(光輝)를 본다


시가 숲을 숨 쉬게 하는 것인지
숲이 시를 길러내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오늘 내가 남긴 낭만의 발자국은
그대로 한 편의 운율이 되어
이름 없는 계곡에 고인다


상상이 멈추는 곳에서 숲은 그저 나무와 풀들의 집합이 되지만, 시가 사는 숲은 매 순간 새로운 우주로 폭발하곤 한다. 그 보랏빛 우주 속에서 오늘 하루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다. "진흙 속에서 고결한 연꽃이 피어나듯, 거친 비늘을 두른 고사리는 내 상상의 숲에서 눈부신 얼음궁전으로 다시 태어났다. 보잘것없는 일상눈부신 환상이 만나 추는 아름다운 왈츠. 그 리듬을 따라 걷는 나의 발자국은 이제 단순한 재활을 넘어, 시가 춤추는 영원한 낭만의 흔적이다."


마음의 스파이크


정적을 깨뜨리며 튀어 오른 스파이크
로마의 기둥 너머 시공을 가로질러
찰나의 뜨거운 불꽃, 숲의 눈을 뜨게 해


무성해진 왕지네고사리(6월 하순)와 잎자루의 비늘이 지네를 닮았다.


[카메라 시조] 왕지네고사리


동아시아 깊은 산중 숲의 왕이 계시었네
한중일 삼국 강산 푸른 대궐 터를 잡아
왕 이름 '킹(King)'이라 불러 우러르는 그 기상

쉰 센티 잎자루는 잎몸보다 짧아도
기부마다 빽빽하게 검갈색 옷 입었으니
지네 발 닮은 비늘이 장수처럼 늠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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