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길어 올린 규수의 미소 / 암고사리

(66화) 암호를 푸는 방법 - BJR→癌→ 暗→ 雌

by 로데우스

암고사리가 품은 비밀
암호를 해독하는 여정
마침내 보게 된 규수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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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고사리가 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 애를 태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고사리사랑 카페에서 제주도의 'BJR'에 암고사리가 있다는 글을 보았다. 'BJR'? 이게 대체 무슨 암호일까? 한참을 고민하고 정보를 뒤진 끝에야 그것이 제주 비자림의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는 좁은 듯하면서도 광대하다. 이 아이러니한 표현은 제주라는 보물섬이 품은 다양성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풍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깊은 숲 한 자락에서 마주한 암고사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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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따르면 암고사리는 제주도를 비롯해 중국 남부, 일본 중부 이남, 베트남 북부 등에 분포한다. 학명은 Diplazium chinens. 포자낭이 서로 마주 보는 '주름고사리속'이며 종소명은 중국에서 자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주도에서 암고사리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강렬한 인상은 '늘씬하고 시원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고운 자태에 이끌려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 새순의 태동과 포자낭의 질서를 담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이 선하다.

통영으로 거처를 옮긴 지금, 제주의 양치식물들을 복기하며 블로그를 뒤져보니, 정작 암고사리에 대한 포스팅은 빠져있었다. 다시금 글감을 찾기 위해 웹을 검색하다가 마음 무거운 글을 마주했다. '암()'을 유추하며 고사리의 독성이 암을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추측이었다. "암고사리, 너는 어떤 비밀을 가졌기에 이런 오해의 시선을 견디고 있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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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암고사리의 '암'은 어두울 암() 자였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그늘진 숲 속에서 자라는 생태적 특징을 그대로 이름에 새긴 것이다. 곶자왈의 습한 음지에서 아주 드물게 자생하는 남방계 양치식물. "너의 이름이 곧 너의 집을 말해주고 있구나." 숲과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백한다. 암고사리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마음속에는 암() 자가 먼저 떠올랐음을. 그것은 존재의 이름에서조차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나의 편견 섞인 애정이었다.


'여성성'이라는 선글라스를 쓰고 바라본 암고사리는 늘씬한 키에 단정한 삼각형 몸체를 가졌다. 촘촘하게 배열된 잎(열편)들은 마치 정갈하게 정리된 여성의 방처럼 가지런하다.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을 가꾸는 고운 모습이 연상된다. 잎 뒤를 살펴보면, 'Asian twinsorus fern'이라는 영어 이름처럼, 나란히 마주 붙은 포자낭군은 수줍은 미소를 띠며 다가오는 여인의 사랑스러움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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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에는 겨울에 잎이 지는 하록성(夏綠性)이라 적혀있지만, 비자림의 암고사리는 그 기록을 비웃기라도 하듯 겨울에도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탐방객 제한 밧줄 옆에서 겨울인데도 늘씬한 몸으로 탐방객을 응시하는 그 모습은, 마치 아늑한 집으로 시집간 규수의 행복한 눈동자를 보는 듯 평온해 보였다.

비자림이란 신비한 공간을 더욱 빛나게 하는 암고사리. 푸른 자태에서 느낀 나의 감성을 서툰 시 한 편에 담아 보낸다.


암고사리

곶자왈(BJR) 깊은 숲
그늘의 숨결 속에
너는 조용히 초록의 부채를 펼친다

어둠(暗)의 이름을 지녔으나
빛을 피함은 그늘을 품기 위함이니
숲의 비밀을 묵묵히 지켜온 존재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며
암호 같은 생의 비밀을 풀어내고
마침내 상상 속의 여인(雌)을 만난다

암고사리여
너의 고고한 푸르름이
내 마음의 숲을 환하게 밝히는구나


#양치식물 #암고사리 #비밀 #규수의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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