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수염의 반항이든, 세월의 농담이든
단아한 처녀 틈에 거칠게 솟은 톱니
세월에 깎여나간 자존심의 흔적인가
흰 수염 바위 꽃 되어 삶의 결을 노래하네
양치식물이면서 '이끼'라는 이름을 품은 독특한 무리가 있다. 바로 처녀이끼과(Hymenophyllaceae)의 처녀이끼속(Hymenophyllum)이다. 이 문중의 구성원들은 이름부터 정갈하다. 좀처녀이끼, 구름처녀이끼, 그리고 그냥 처녀이끼까지. 그런데 이 단아한 처녀들 틈에 뜬금없이 끼어든 불청객이 하나 있으니, 바로 수염이끼이다.
왜 하필 수염일까. 다른 처녀이끼들의 잎 가장자리가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것과 달리, 이 녀석은 거칠고 불규칙한 톱니를 세우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덥수룩하게 자라난 남자의 수염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명인 Hymenophyllum barbatum의 종소명 'barbatum' 역시 라틴어 'barba(수염)'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오늘날 이발소를 뜻하는 '바버숍(Barbershop)'의 어원이 되기도 했으니, 수염이끼는 이름부터 뼛속까지 '남성적'인 셈이다.
젊은 시절, 면도는 매일 아침 치러야 하는 성실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사회라는 전장에서 물러난 시니어에게 수염은 이제 귀찮은 짐이자, 제주에서 경험한 '진드기'처럼 살을 파고드는 존재가 되었다. 특히 낙상 사고 후 제주탈출과 수원에서의 수술로 이어졌던 고통의 일주일 동안, 거울 속 내 얼굴을 뒤덮었던 그 거친 수염은 깎는 것조차 고역인 천덕꾸러기였다.
처녀이끼들이 귀한 몸 대접을 받으며 깊은 곳에 숨어 지낼 때, 수염이끼는 계곡의 절벽이나 바위에 억척스럽게 붙어있어서 흔히 발견된다. 그 모습은 통영의 차가운 바닷가에서 홀로 시간을 견디는 시니어들의 뒷모습과 닮아 보였다. 내가 처음부터 녀석을 동지로 여겼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 동지가 반항을 시작했다. 검은빛 사이로 드문드문 흰색을 섞더니, 어느덧 얼굴 전체를 점령할 기세이다. "나를 좀 보라"며 아우성치는 흰 수염 앞에 서면, 수염이끼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내가 좀처녀이낀가, 난장이이낀가 헷갈렸지? 이게 바로 나의 본성이야"라고 외치는 환청이 들린다. 이제 수염이끼와 나는 다정한 동지를 넘어, 서글픈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적수가 되었다.
여기에 기막힌 변수까지 생겼다. 최근 발간된 <한국의 양치식물 제3판>에 '애기수염이끼'가 새로 수록되었는데, 이 녀석은 이름에 수염을 달고서도 정작 잎에는 수염(톱니)이 없단다. 다시 처녀이끼들 틈으로 매끄럽게 숨어든 꼴이다. 이 무슨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설 명절, 내 입에서 쏟아지는 수염에 대한 하소연은 빨래터의 방망이질 소리처럼 내 귓가를 때린다. 그러나 빨래가 묵묵히 그 방망이질을 받아내며 때를 벗긴다는 생각에 미쳤다.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는 이 수염 또한, 결국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거친 톱니가 아니겠는가. 수염이끼의 반항이든, 세월의 농담이든, 흰 수염 덥수룩한 얼굴로 고개를 드니 수염이끼가 건네는 위로가 사뿐히 다가온다.
"어르신, 저도 처녀들 틈에서 이 거친 톱니잎을 들키기 싫어 계곡 깊은 바위 뒤에 숨어 지냈답니다. 하지만 통영 바다의 찬 바람을 견디며 홀로 서 계신 어르신을 생각하니, 제 거친 톱니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훈장처럼 느껴지네요. 흰 수염이 압도하면 좀 어떻습니까. 그게 다 세월의 결이고, 바위 위에 낀 이끼처럼 단단하게 살아온 증거인걸요."
ㅡ 수염의 훈장 ㅡ
빳빳한 수염 털은 이발소의 어원 되고
낙상한 빈 얼굴엔 진드기만 드글댄다
바닷가 바람 맞으며 하얀 수염 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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