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깃든 정신을 묻다 / 버들참빗

(69화) 누군가의 그리운 청춘

by 로데우스

버들참빗은 어느 규수의 머리결

시루뻔버섯은 우리네 삶의 조각

유리창떠들썩나비는 교실안 웃음소리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4969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wdkx1mFewtrIMcBXQirybldDCHc%3D 버들참빗 포자낭군은 참빗을 닮았다.


[카메라 시조] 버들참빗


양치식물 버들참빗 정갈한 포자낭군

알알이 포자주머니 참빗을 만들고

규수의 머릿결 사이 시가 되어 흐르네




거울 앞에 단정히 앉아 참빗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규수의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정갈한 풍경 속에 녹아든 '버들참빗'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지순하고 아름다운가를 말이다. 요즘이야 미장원에 가서 돈만 내면 뚝딱 모양을 만들어내는 세상이라지만, 작은 거울 하나에 의지해 스스로를 정성껏 가꾸던 그 마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참빗이 무엇인지조차 잊어가고 있지만, 다행히 '버들참빗'이라는 양치식물의 이름 덕분에 우리 고유의 명사는 사라지지 않고 그 맥을 잇고 있다. 우리 말은 형용사는 풍부하나 사물의 이름을 정의하는 명사가 귀한 것이 약점이라는데, '참빗'처럼 예쁜 이름을 지켜낸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동식물 이름 중에 이끼 이름이나 나비 이름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정겨운 이름들 틈에 난데없는 이끼 이름 중 '배루카엄마이끼'라는 게 새로 들어왔다. 엄마이끼, 큰엄마이끼, 털엄마이끼, 들엄마이끼... 듣기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엄마'의 항렬 속에 대체 누가 '배루카엄마이끼'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을 끼워 넣었단 말인가. 혹시 사람이 아닌 차가운 AI가 지어준 이름일까?


이름 모를 버섯에게도 '시루뻔버섯'이라는 우리네 삶의 조각을 붙여주었으며, 석주명 선생은 나비 하나에도 보석 같은 이름을 입혀주었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부모가 작명소까지 찾아가 고심하며 이름을 짓듯, 이름에는 마땅히 그 존재의 혼과 주인의 정성이 담겨야 한다. 아이가 이름 때문에 놀림당해 개명을 고민하고, 누구나 자신만의 애착이 담긴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이 시대에 '배루카엄마이끼'라는 이름은 너무도 무책임하다.

알고 보니 '배루카'는 서양의 학명을 일본식 발음으로 어설프게 흉내 낸, 그야말로 족보 없는 말에 불과했다. 우리 산천의 주인에게 남의 나라가 망가뜨린 발음의 찌꺼기를 이름이라 붙여준 꼴이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런데, 버들참빗을 보며 어머니보다 할머니를 먼저 떠올리는 나의 이 아이러니라니. 근본 없는 이름을 지어준 이들도 이런 아이러니에 빠져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상적인 세상 속에서 나 혼자 비정상이 되어버린 걸까?

그러나 낙상자가 겪는 '정상 속의 비정상'을 교정하는 재활의 고통보다 더한 스트레스 같은 이 지독한 마음의 질환은, 아름다운 것들이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실 앞에서 부르짖는 간절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4969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kE3AORys0zOSTh5zyMfnFokl3oo%3D 고란초가 살고 있는 바위벼랑에 버들참빗도 무리를 이뤘다.



버들참빗 - 이름의 향기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향한 손주의 마음은
아흔 넘어서까지 고고했던 할머니의 그늘에서
누군가의 그리운 청춘을 선명하게 조우하네

거울 앞, 참빗으로 결 고르던 정갈한 소리
그 결마다 느껴지는 감정은 시니어의 눈물
지켜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픈 고백이네

김 오르는 시루 틈을 메우던 시루뻔 하나
배고픈 어린 입술엔 세상 가장 귀한 간식
그 고단했던 허기와 눈물을 머금고
시루뻔버섯은 우리네 삶의 궤적을
묵묵히 증명하며 피어나네

유리창에 부딪히며 펄럭거리던 날개
교실 안을 휘젓던 소란한 날갯짓
유리창떠들썩나비의 그 분주함은
담장 너머 번지는 여학생들의 재잘거림
생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찬란한 웃음소리였네

수원 집 사진 대신 통영에서 모신 하얀 지방(紙傍)
일터로 나간 자식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어느 노부부의 낮고도 깊은 기도

이름을 지키고,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고집은
삭막한 세상 위로 피어나는 가장 고귀한 사회의 꽃이 될까



#양치식물 #버들참빗 #이름의혼 #시루뻔버섯 #유리창떠들썩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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