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생각을 방해해서 미안해! (미술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걸까)
처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막 입학한 첫 해인 겨울이었다. 동네 꼬마들이 하나 둘 우리 집에 모였고 나는 대학생 선생님이 되었다. 그때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입시 미술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는 그때 배웠던 방식 그대로 아이들에게 입시 수채화를 지도했다.
내가 그린 입시 스타일 정물화 그림을 벽에 붙인 다음 아이들에게 모작을 시켰다. 아이들이 스케치를 하면 형태를 ‘맞게' 고쳐주고, 채색을 끝내면 내가 다시 색을 덧입혀서 고쳐주었다. 아직도 그 초등학생들이 이젤 앞에서 내 그림을 보고 그림을 힘겹게 그리던 모습이 선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날, 갑자기 한 아이가 주제와는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나는 주제에 벗어난 ‘잘못된’ 그림이라는 생각에 주저 없이 지우개로 다 지워버리고 다시 그리기를 권유했다. 나는 지금, 그 그림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지, 아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아직도 궁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의 편협한 시선 때문에 성인이 된 그 아이에게 미술이 억압된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알맞은 정답이 있는 입시 미술은 단지 진학을 위한 수단과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 미술의 극히 일부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상당한 시간에 걸쳐 깨달았다. 입시미술처럼 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안정감을 주고, 정해진 기술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입시미술을 어린아이들에게 쉽게 접근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 아이들이 미술시간에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 미술은 정답이 없다. 미술은 외부의 것들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학습과는 달리 충분히 내 안의 것이 밖으로 표출될 수 있는,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표현의 과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담아내고 나만의 길을 가도 충분히 빛나는 과목이다. 특히 내면의 마음적인 측면은 어른들의 그림보다 아이들의 순수한 창작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학 진학을 위해 입시미술을 할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잠시동안 내 그림의 지워짐과 고쳐야 함을 이해할 수 가있다. 그런 고쳐야 하고 익혀야 하는 미술을 어린 시절에 경험할 필요는 없다. 미술시간에서 어른의 역할은 아이들의 표현을 지우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이 미술과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에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미술을 즐길 수 있고, 훗날 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말이다.
대학시절 만났던 아이들에게 ‘너의 생각을 방해해서 미안해!’라고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다시 아이들의 표현을 방해하는 방해꾼 어른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