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B20층과 B19층 사이 오르막 계단이다. B20층에서 올라가는 문을 열고나서 어두운 오르막길을 한참을 걸었다. 너무 어두운 탓에 오른쪽 벽면을 짚으며 천천히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
눈앞에 'B19'라고 쓰인 문이 보인다. 드디어 앞자리 숫자가 바뀐 층에 왔다. B19층. 이곳은 계단에서 올라갈 때부터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던 층이다.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B19층으로 가는 문을 연다. 이윽고 문을 통과하자,쿵- 소리를 내며 뒤에서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B19층은 마치 동굴을 연상케 했다. 천장에서는 물이 계속 떨어졌고, 떨어진 물들로 인해 바닥의 이곳저곳이 흥건하게 적셔있었다. 심지어 천장에 하나밖에 없는 전등은 습기 때문인지온전치못하듯 불규칙하게 깜빡거렸다. 그러다 불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음습했다. 나는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B19층에서 오로지 청각에 의존했다. '톡- 톡. 톡- 톡-.' 물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둠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보단 규칙적이게떨어지는 물소리 덕분에서서히 안정감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과거의 한 시점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이 시절. 나는학교에서 레전드 학생이 될 뻔했다. 바로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5학년때까지 반장과 부반장을 연임했던 이력 덕분이었다. (6학년때까지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
이런 레전드를 만든 첫 시작은 사실 엉뚱했다.
2학년 학기 초. 어느 정도 반 분위기에 적응할 즈음,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반장과 부반장을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반 친구들은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아니면 된다.'며 평소 쉬는 시간만 되면 시끌벅적하던 반의 분위기는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에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해졌다.
(사실 초등학생 2학년이 반장, 부반장의 개념을 제대로 알리 없지 않은가?)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리도 이해할 수 있게 다시 개념을 말씀해 주셨다.
"우리 반을 위해 책임을 지고 봉사할 수 있는 친구가 반장, 부반장을 하면 어떨까하는데, 지원자 있을까요?"
선생님의 쉬운 설명 덕분에 이제야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반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 명도 손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몇 분의 정적을 깬 건 바로 내 앞자리 친구였다. 그 친구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멋있었다. 나를 포함해 모든 반 친구들은 그 친구를 보며 '저 친구 대단하다.'라는존경의 눈빛을 친구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한 나의 존경 어린 눈빛은 그 친구의 대답을 듣고 나서 바로 고이 접어 책상서랍에 넣었버렸다. 아주 깊숙이..
그 친구는 정. 확. 히. 아주 똘. 망. 똘. 망. 하고 당. 찬. 목소리로 뒤에 있는 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대현>을 추천합니다."라고 했다. (*참고로 대현은 내 이름이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거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네가 하는 거 아니었어? 라며 그 친구와 눈빛으로 말했다. 그 친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친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친구였다. 항상 하교를 같이하던 친구였는데 장난식으로 나를 추천한 듯했다.나도 복수를 한다며 그 친구를 추천했다.그렇게 장난반 진담반으로 우리는이번 학기 반장선거에 후보로나가게되었다. 후보로는 총 대여섯 명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차피 몇 표 못 받고 탈락하겠거니 생각하며,'반장이 된다면 어떻게 이 학급을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를 반 아이들에게 말하고 자리에 돌아왔더랬다.
그런데.. 내가 말한 포부가... 뭔가 잘못됐던 걸까?
나는 압도적인 몰표 수준으로 반장이 되었다. (그러자 앞자리 녀석이 날 쳐다보며 웃어댔다. 사악한 자식.)
그리고 그 친구는 부반장이 되었다. (나도 그 친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좋은 건 같이 하는 거야 친구야.)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이 반의 대표이자책임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해야 하는 반장이 되어버렸다.
반장의 역할은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거나 담임 선생님의 부재 시, 교탁에 나와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의 이름을 칠판에 대문작만하게 적어 시끄럽지 않게 하면 되는 정도였다. (물론 선생님께서 오시면 바로 지웠다.)
그러다 한 번은 몸이 아픈 친구의 조퇴를 도와주게 된 적이 있었다. 몸이 아픈 친구의 집이 조금 먼 거리라 부축을 하며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아이들이 하교를 했고, 담임선생님만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가방을 갖으러 온 나를 보며 대견하게 말씀하셨다.
"대현이 너는 책임감이 참 강하구나."
이 말은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책임이라는 것은 무겁지만 갖고 있으면 인생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음 학기에는 부반장으로. 3학년에도 1학기에는 반장, 2학기에는 부반장. 4학년에도 반장, 부반장. 5학년에도 반장, 부반장을 내리하며 '나'라는 존재는 반 아이들과 선생님께서 믿고 맡기는 '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6학년 때 깨달았다. 아쉽게도 나의 책임감은 6학년이후부터 남들에게 내 책임을 보이는 걸숨기기라도 하듯,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그저 일반 학생처럼 변해갔다.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된 상황에서 수없이 많고 작은 책임들에 허우적대다 정신을 차려보니 문득 엄청나게 큰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바로 결혼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장이 되어버렸다.
부모님의 슬하에서 벗어나 새로운 팀을 꾸려 시작이라는 흰색선상에서 총성 소리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이라는 꿈에 부풀려진 이 운동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통과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나를 계속 달리게 만들었다. 누구의 채찍질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니. 책임이라는 채찍질로 내가 내 등을 치면서 말이다.
나는 아침에는 회사에서 일에 전념하고, 퇴근한 후 집에서는 사랑받는 남편이 되고자 집안일을 도왔다. 심지어 잠들기 전 남은 자투리 시간은 이 집안을 더 키워보기 위해 공부를 했더랬다.과거의 나는 그랬다.
그렇게 1년. 나는 잘 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옆을 보니 나 혼자 뛰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둘러보면서 뛰다가 앞에 있는 돌에 걸려 넘어졌다. 하필 넘어진 위치가 운이 좋지 않게 가파른 경사로였고, 나는 그대로 굴러 떨어져서 지하인이곳까지 낙하하게되었다.
나는 최근에 한 드라마에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굿파트너'라는 드라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명언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를 줄곧 좋아했다. 예를 들면 '스토브리그', '미생' 등이 있다. 스토브리그는 명언모음집이 있을정도로 엄청난 명대사들이 많다. 이처럼눈이 화려한 영상을 보는 것보단 뭔가를 얻어갈 수 있는 그런 드라마나 영화가 좋았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왜 '굿파트너'에 빠졌냐고 물어본다면 다 이유가 있다. 명대사도 많거니와.. 그렇다.... [생략]
그렇게 열심히 몰입을 하며 드라마를 보다 보니 정말 격하게 공감을 하게 만드는 대사가 나왔다. 아마 책'어린 왕자'를 봤다면 한 번쯤은 봤을 대사였다. 그 대사는 작가님이 대본에다가 아주 크게 별표를 그려 넣은 듯이... 배우들 각자의 목소리로 이 대사를 여러 번 읊는 장면이 나왔다. 그 대사는 이렇다.
이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그러나 너는 잊으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너는 네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너는 네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사실 나는 이 대사를 듣자마자 속에 응어리져 있던 뭔가가 퍽-하고 터져나가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참고 있던눈물을 많이 흘렸었다. 갑자기 너무 아프게 한 대를 맞은 느낌이 들면서 나온 눈물이었다. 그 후. 그 장면을 여러 번 다시돌려봤다. 내 아픔이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그대로 비쳤다. 배우들의 명연기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같은 상황 속에 있는 '나'라는 사람을 저 드라마에 이입시켜서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을 보는 '나'라는 사람은 어느새 차은경(배우장나라)이 되어있었고, 김재희(차은경의 딸)가 되어있었다.
그들의 눈물은 흘리면 안되는 눈물이었다. 그들의 슬픔또한 겪지 말았어야 했던 슬픔이었다. 왜 그들이 아파야 했을까. - 드라마 '굿파트너' 의 한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그동안 잊고있던 '내 안에 장미'라는 존재를 다시 찾게 되었다. 그동안 내 안에 있던 장미를.. 좀 많이 모질게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다지 관심이 없이 지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가다듬고 내 장미에게 다가가니 새빨갛게 활짝 피어있던 과거의 그 장미는 어느새 무채색을 띠며, 고개를 하염없이 땅 끝에 닿기 직전까지 꺾고 있었다.
미안해졌다. 내가 나의 장미에게 미안했다. 내 눈물이 거름이 된다면 계속해서라도 흘려주고 싶었다. 한 번도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 없는 나 자신을 탓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식물을 잘 키운다고 해서 잘 자라나는 장미가 아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나는 내 장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혹시 독자분들은 '어린 왕자'라는 책이 사실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걸 아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왕자'라는 책을 어린이권장도서로 추천해 아이들에게 많이 읽게 한다. 학창 시절 때 열린 독서경연대회에서 유독 많이 보이던 단골 지문이 어린왕자였던게 기억난다. 그만큼 이 책을 많이 읽었던 경험은 있는데 현재는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다 드라마에서 나온 저 명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채찍질을 좀 하기 위해 '어린 왕자' 책을 샀다.
우리는 과거에 봤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다. 아니. 잃어버리고 살게 된다. 판도라라는 상자 안에 차곡차곡 내 과거를 채운다. 내겐 이 '어린 왕자'라는 책에 대한 기억도 판도라의 상자 안에 '잃어버린 것들' 목록란에서 겨우 찾은 것에 속했다. 그리고 느꼈다. 과거, 어리고 젊었을 때 봤던 것을 현재 다시 보게 된다면 정말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감회가 새롭다는 걸. 내가 취직을 준비할 때 봤던 '미생'이란 드라마를 취직을 하고 나서 현재에 다시 보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새롭다. 그리고 보는 시각과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아마 시간이 많이 지나면 나의 판도라 상자 안에 '잃어버린 것들' 목록에 올해 일어난 일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꺼내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현재의 나와 달라진 나는, 또 다른 관점으로 이 사건에 대해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기우였어. 덕분에 인생 전환점이 됐어. 오히려 나에겐 좋은 일이었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희미해지던 전등에서 다시 불빛이 들어온다.
'톡- 톡-'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과 함께, B19층의 벽을 타고 흐르는 많은 물들이 눈에 들어왔다.무심코 벽에 흘러내리는 물을 보다가 생각했다. 이번 층은 내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내가 무엇을 깨달아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줄까? 그때 다시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강하게 무게를 지탱하는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그 물을 보고 있자니. 강한 나의책임감 앞에수없이 많이 좌절하고.. 수없이 많이 탄식했던.. 그 당시의 내가 흘린 눈물이 보였다.내 안에 있는 장미의 눈물이겠지.
현재는 내 장미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장미에게 새로운 거름과 물을 주고 있다.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중이다.비록 장미의 이파리마다 잘려나간 상처들이 있지만 말이다. 깊은 상처는 극심한 고통과 쓰디쓴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깊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다. 물론 그 상처는 평생 없어지지 않는 자국을 남기지만, 어느새 고통이란 존재는 사라져 있다. 상처 자국을 보면 더 이상 고통은 느끼지 못하지만 그 당시의 기억이 남는다. 나도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게 될 것이다. 단, 이 없어지지 않는 상처를 절대 혐오하거나 보여주기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내가 다시는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반성의 의미를 담은 상처가 될 것이다.
책임. 결코 가볍지 않은 단어다. 무거운 만큼 신중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명심하자.
B19층에서 필요했던걸 얻자 이번에는 올라가는 문이 저절로 열려 있었다. 의문을 품지 않고 얼른 그 문으로 들어간다. 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힘이 부쳤다. 계단에 잠깐 걸터앉아 쉬는 중에 어디선가 쪽지 하나가 날아왔다. 쪽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그 쪽지에는 나에게 브런치라는 어플을 알려주신 고마운 분의 응원메시지가 쓰여있었다. 요새는 작은 응원 하나에도 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