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기대감과 목표감 그리고 '앞으로 잘해야지.'라는 다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마냥 좋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나에게 '처음'이란 단어는 기대, 목표, 다짐보다는 항상 걱정, 불안, 두려움, 귀찮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런 공포가 내재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나란 사람은 무언가를 열심히 잘 찾아서 하던 아이였는데 그게 어느 순간 귀차니즘으로 변해버렸다.
삶의 권태는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처음 시도하려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우선 뜸을 들였다.
이런 패턴의 반복은 항상 처음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뭔가를 해보자.' 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처음인데?'라는 생각을 갖는 순간 우선 출발선에서 멈췄다.
심판은 뛰라는 총성을 올린 지 한참이 지난 뒤 나에게 어서 뛰라고 했지만, 나는 시작점에서 등을 돌려 생각했다.
'이걸 하면 어떻게 될까?'
'저걸 하면 괜찮을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귀찮은데..'
이런 패턴이 가장 많이 보인 건 처음으로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할 때였다.
때는 20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의 강한 권유와 꼬심으로 '내 첫 운전면허증 따기.'라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아마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러 가는 과정도 그렇게 쉽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친구들과 운전면허 필기시험과 기능시험을 다 같이 통과한 후.
한참 도로주행 연습을 할 때였다.
이맘때도 현재와 비슷한 8월의 날씨였더랬다.
햇빛이 쨍쨍하던 날.
나는 덥다는 핑계로 도로주행시험을 신청하고 당일날 첫 시험을 늦었다.
(시험을 등록해 놓고 출발시간을 미루고 미루다가 지각을 해서 자격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제 다음 시험을 신청할지 우선순위를 점점 뒤로 미루다가 사건이 터졌다.
국방부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우편이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신체검사를 받고 나는 최종등급을 알려주는 대기의자가 아닌 검사실로 들어갔다.
X-ray 사진에서 뭔가가 발견됐다고 한다.
'기흉'이었다.
(*기흉: 공기주머니에 해당하는 폐에 구멍이 생겨 공기가 새고 이로 인해 흉막강 내에 공기나 가스가 고이게 되는 질환)
그 당시에는 기흉이라는 게 뭔지 몰랐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더욱 의아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숨이 잘 안 쉬어지거나 걷거나 뛸 때 힘든 적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냥 보통날처럼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집에 가는 길에 건강했던 몸이 병의 증상을 듣고 나자 플라시보 효과처럼 점점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집에서 겨우 숨을 내 쉴 정도로 눕지도 못한 채 앉아서 잠에 들었다.
(누워 있으면 흉부가 압박되기 때문에 결코 누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기흉'이라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결국 운전면허증 따기라는 우선순위는 하염없이 뒤로 밀려났다.
어두운 수술실 안. 수술 날짜가 바로 잡히고 수술 당일.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부모님과의 만남이 마지막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태연한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썼다.
환자복 하나만 걸치고 누워있어서인지 무더운 8월인데도 수술실 앞은 무척 춥게 느껴졌다.
나는 살면서 처음 받는 큰 수술이라 많이 두려웠다.
매번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보던 걸 직접 겪다니...
드디어 수술 시간이 되고. 평생 단 한 번도 들어가기 싫은 그곳의 문이 열렸다.
나는 누워있던 터라 천장만 보였고 그나마 고개를 돌려야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오는 입구에선 환한 빛이 보였는데, 다음 문을 통과하니 매우 낯선 냄새와 엄청 추운 공간으로 옮겨졌다. 더군다나 사방은 아주 조용하고 어두웠다.
심지어 수술 중에 움직이지 않게 양팔과 다리를 묶었다.
수술실은 한없이 춥고 무서워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때마침 오신 의사 선생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잘 될 거야.'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추운 수술실에 실오라기 같은 온기로 다가왔다.
전신마취를 하기 위해 마취성분이 든 기체를 코로 들이마셨다.
제주도에서 나는 향긋하고 달콤한 한라봉 냄새가 났다.
세상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궁금했는지 한번 더 맡아보고 싶은 마음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기억이 사라졌다.
수술을 받으며 어떠한 기억도 나질 않는다.
눈을 뜨니 천국에 온 것처럼 아무 소리도 안 들렸고 주변이 너무 환해서 눈을 뜨기 어려웠다.
잘못됐나? 천국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쯤 간호사님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의술의 발달로 조그만 상처 4군데를 옆구리에 남기고 수술을 끝마쳤다.
(수술 이후로 상처가 보일까봐 상의탈의를 좀 싫어하게 되었다.)
아마 이때가 내가 처음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는 계기였으리라.
수술 전까진 이대로 많은 경험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연애도 취직도 그리고 결혼도. 아직 못해본 게 많은데...
아마 죽음을 앞두고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그간 미뤄왔던 모든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은 장시간의 수술에 망신창이가 되어 세상에 나갈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회복을 한 후. 내가 바로 한 일은 도로주행 시험 신청이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한 나의 첫 목표였다.
하지만 첫 도로주행시험은 절대 나오지 않았으면 했던 최고 난이도 코스가 걸려 길을 잘못 들어 불합격을 했다.
좌절했다. 돈이 아깝다기 보단 운이 없다 생각했다.
수험생들 모두 나와 같은 코스를 걸린 사람들을 안쓰럽게 쳐다볼뿐이었다.
면허증 따는것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다시 살게 되었으면 이 정도는 별 것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바로 다음 시험을 또 접수했다.
참고로 나는 강서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시험을 봤다.
서울에서 보는 시험인 만큼 많은 수험생들과 주변 일대는 수많은 차가 어느 시간대에든 지나다닌다.
하필 다음 시험은 나와 같이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내 시험시간이 점점 퇴근시간 때로 밀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두가 제일 쉬운 코스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금요일의 마법이었을까.)
기다리는 동안 지금까지 배웠던걸 머릿속에 복습하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급작스런 상황에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내 차례가 오고.. 감독관님과 다음 시험대기자분과 함께 트럭에 올라탔다.
"출발해 보세요."
감독관님의 말에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 변속기어를 잡았다.
더 이상 처음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기어를 변속하니..
갑자기 옆에 동승했던 감독관님께서 들고 계시던 채점노트와 펜을 무릎에 놓으셨다.
기어 변속이 깔끔해서 그랬을까. 더 이상의 채점은 불필요하다 생각하신 것 같았다.
운전 중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퇴근길 서울 한복판의 러시아워는 그 기분을 깨기에 충분했다.
기어를 변속해야 하는 트럭의 경우, 가장 어려운 코스가 바로 오르막길에서 정차했을 때다.
이유는 기어를 변속해 앞으로 가는 과정에서 차가 뒤로 밀리는 공포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시동도 많이 꺼진다.)
기분 좋게 운전하는 와중에도 제발 오르막길에선 멈추지 말아 달라는 소원을 빌며 운전을 했더랬다.
그런데 역시나...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확히 지하 터널을 빠져나가는 오르막에서 수많은 차와 함께 정차를 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내게 또 시련을 주는 건가 싶었다.
물론 오르막에 시동 끄지 않는 연습을 많이 했지만 머릿속의 세포들은 요란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때 옆을 보니 태연하게 앞만 보시는 감독관님의 표정이 눈에 보였다.
덩달아 나도 태연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편하게 나의 드라이브를 즐기시던 감독관님의 모습에 묘한 안정감이 생겼다.
드디어 신호가 떨어졌는지 앞차들이 출발했다.
태연함에 묻힐 줄 알았던 긴장감이 다시 올라왔다.
바로 앞차가 출발했다.
내 트럭과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이젠 나도 가야 한다.
제발 뒤차가 경적을 울리지 않길.
시동 안 끄고 한 번에 올라가길.
제발.
제발.
결과는 시동을 한 번 꺼먹었다.
하지만.. 거의 1초 만에 시동을 다시켜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러니 오히려 감독관님께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참고로 시동을 2번 꺼야 탈락이다.)
그렇게 마지막이 된 운전면허시험에서 기분 좋게 합격해 면허증을 발급받았다.
면허증을 두고 한 목표를 3달이 되어서야 겨우 땄다.
그래도 인생에서 처음 따본 국가자격증이라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다.
현재는 수많은 시도와 처음을 맞이하려는 자세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거의 180도 달라졌다.
행동에는 거침이 없어졌고 '처음'은 이제 나에게 목표와 기대감을 주는 단어로 바뀌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를 읽으니 '처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더욱 탄탄해졌다.
처음이라고 물러서지 말자.
두려워하지도 말자.
처음이 무서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된다.
실패는 결국 시도를 해봤다는 것이고
성공은 실패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내 인생은 현재 새로운 시작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기흉'이라는 병은 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줌과 동시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의 일련의 사건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줌과 동시에 삶을 살아갈 이유를 없앨뻔했다.
누군가는 물었다.
왜 B23층부터 시작하냐고.
내가 살았던 곳이 23층 아파트였다.
이번 사건으로 내 안의 많은, 그리고 다른 현실 세계의 '나'는 수없이 많이 그 높은 층에서 뛰어내렸다.
수없이 많은 상상과 죽음을 앞둔 후의 고통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집 층수에서 던져버린 내 마음들을 표시하기 위해 거꾸로 B23층을 택해서 글의 시작을 했다.
수많은 비관적 상상에서 나를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였다.
제2의 인생을 살아갔던 과거의 나.
격동기를 맞이했어도 버티려 했던 현재의 나.
제3의 인생을 맞이할 미래의 나.
그렇게 현재의 나와 타협을 하고 보시다시피 계단을 오르고 있다.
물론 과거의 나보다 더욱 강한 멘탈이 점점 자리 잡고 있다.
현재의 나는 처음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있다.
그래서 누가보기에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그중에 몇 가지 목표를 소개해보자면 이렇다.
1년 안에 테린이 대회에 나가 우승을 목표로 하고자 테니스를 취미로 두었다.
3년 안에 웹소설 작가가 되어 전 세계에 내 글을 알리기 위해 내 소중한 일요일에도 학원을 다니고 있다.
(물론 영어공부도 병행 중이다. 영어 인터뷰도 연습해놔야 한다 생각했다.)
5년 안에 많은 걸 이루기 위해 수많은 목표들을 적어놨다. 그중에 하나는 바로 좋은 사람을 만나 진정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큰 목표도 있다.
10년 안에 우리 사업체가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 목표를 두었다.
현재 40살의 미래의 내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다만 너는 현재 몇 층에 있는 거야?라는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재의 나보다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가 저 위에서 나를 보고 있다는 것 하나는 느낄 수 있었다.
처음은 항상 두렵다.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을 겪은 뒤에는 오히려 두려웠던 마음보다 '별거 아니네.'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면 성공한 것이다.
처음 시도를 했다는 것은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시작을 했다는 건 행동을 한 거다.
행동을 함으로써 경험은 축적된다.
축적된 경험은 성공으로 직행한다.
모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
시도를 하고 실패를 맛보는 것과
시도도 안 하고 실패했다 하는 것은 차이가 아주 크다.
그러니 나이 한 살 더 먹기 전에 지금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했지만 어떤 일 때문에 못했던 일,
하고는 싶은데 핑곗거리만 늘게 되는 일,
이러한 일들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라.
당신 인생의 제2막 제3막... 제 n막은 사실 당신의 바로 눈앞에 와 있을 수도 있다.
못 본 체 할 텐가? 아니면 그 기회를 잡을 것인가? 는 당신의 선택이다.
오늘도 올라간다. 항상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