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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의 브런치 Dec 21. 2024

여자를 이겨먹고 싶은 순간의 치기가 불러온 파멸

<슈테판 츠바이크>의 아모크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여자가 저보다 강하다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저에게 강요할 힘을 지녔음을 직감했지만... 하지만... 하지만 제 안에는 못된 마음이 남아서... 지지 않으려는 남자 심보 같은 것 때문에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아모크>



아모크란?

말레이족에게서 나타나는 만취 상태 이상의 것으로 광기, 특수한 정신착란의 명칭입니다.
급격하게 흥분해서 폭행ㆍ살인 등을 범하는데 뒤에 두드러진 피로와 기억상실을 남깁니다.




독일 종합병원에서 제법 괜찮은 의사였던 주인공은 여자 문제로 금고에 손을 댑니다. 그는 항상 교만하고 건방진 여자들 앞에서 꼼짝 못 하는 면이 있었지만 이번엔 커리어를 끝장낼만한 사고를 여자 때문에 치게 된 것이죠.

최악은 모면하고 식민지에 파견할 의사를 모집한다기에 10년을 계약하고 인도로 향합니다.


7년이 넘게, 사람의 영혼을 잡아먹는다는 덥고 축축한 인도의 밀림에서 나른함과 게으름에 엿가락처럼 늘어져 서서히 퇴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무기력하고 향수에 젖어있던 어느 날 귀부인 백인 여자가 그를 찾아옵니다.

이 자체로 그에겐 사건입니다.


쉬 꿰뚫어 볼 수 없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굳건한 얼굴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죠.


그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고 의사인 자신에게 부탁을 해야 하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지시 같은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본디 교만하고 건방지고 강한 여자들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그였지만, 오랜 세월 열대의 나른함에 퇴보한 탓인지 이 여자에게 정중하게 부탁하도록 강요하고 싶은 난폭한 욕망에 순간 사로잡혀 버립니다.


생사가 걸린 상황인데도 귀부인 행세를 하면서 범접할 수 없이 도도하고 냉담하게 흥정을 시도한다는 사실이 저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모크>


그는 억눌리고 숨어 있던 자기 내면의 모든 사악함을 자극해서 그녀에게 저항하게 했고 이 여자를 모욕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고 오직 그녀의 교만함을 꺾고... 남자답게 주도권을 쥐겠다는 욕망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제시한 목돈(남은 계약기간 2년을 채우지 않아도 인도를 떠날 수 있을 돈)도 거절하고 그녀에게 거래를 시도합니다.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라고...

그리고 그녀는 그가 요구하는 것이 돈이 아닌 무엇임을 알아차리고 분노합니다.


굴복하기는커녕 경멸감에 차서 의사를 바라보며 깔깔 웃어대고 차라리 파멸의 길을 걷겠다며 돌아섭니다.

(그녀는 며칠 후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낙태시술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의사를 찾아왔죠.)


이대로 돌아가면 말 그대로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에도 조금의 망설임과 굴복 없이 돌아서는 그녀를 보고서야 번개를 맞은 듯 온몸이 불타오릅니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따라가려 합니다. 그녀에게 사과하고 애걸하려고요. 저항할 힘이라곤 남아 있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이미 그를 더 이상 상대하지 못할 인간으로 여기죠.


이후 그는 아모크에 가까운 광기의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가 도우려고 시도하지만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순간의 못된 심보가 불러온 파멸의 원인은 뭘까요?


너무 오랜 기간 열대의 기후에 퇴보하고 나른해진 탓인 건지, 향수병에 빠져 판단이 흐려진 건지 의사는 자신이 본래 고압적이고 교만하고 강한 여자들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일까요?


자신의 본능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끌리고, 이끌렸다는 사실을 잊은 듯합니다.


자신 앞에 백인 여인이 나타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으면서도

너무 오랜 시간을 푹푹 찌는 열대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죽어가듯 산 그에게 도도하고 강압적인 그녀를 본 순간 굴복하지 않고 억눌린 모든 사악함을 끌어와 그녀를 발아래 굴복시키고 싶다는, 순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솔직히 인간 대 인간이 부딪히면, 동물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기가 느껴지기도 하죠. 절대적으로 나보다 강한 기운은 느껴집니다.

그냥 순응하면 편할 것을 도발하는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요.


그도 알면서 순응하지 못했죠.

남자로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여자가 고고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목숨을 구하기보다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죠.


순간의 못된 심보가 누군가에게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백 페이지가 되지 않는 단편을 읽으면서 저는 생생한 심리묘사와 서사에 매료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의사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치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결말로 달려갔죠.


내 본성을 잘 알면 어떤 일을 피하는 것이 상책인지 알 수 있어요.

본성은 변하지 않기에 내 본성을 잘 관찰해 두면 어떤 상황에 놓이면 내가 약해지고 피하기 힘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겠지만, 타인의 두려움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 사람은 그건 절대 못 견뎌 ‘

‘그건 정말 건들면 안 돼’.. 이런 거 있잖아요.


순간의 치기가 때론 서로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모크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언제나 되새겨야 하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이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기울인 경험은

같은 과정으로 타인도 들여다볼 힘을 줍니다.






올해 찾아낸 보석 같은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읽기를 시간낭비라고 여겼던 오만한 시절이 있었어요.

이젠 소설을 통해 사람을 알아가는 맛을 느끼는 저는 사람의 심리를 잘 쓰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작가와 작품을 찾았어요.

그러다가 심리의 대가라는 슈테판 츠바이크를 알게 되었고 첫 작품으로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단편 <아모크>를 선택했습니다.

[하영북스 <감정의 혼란> 소설집 수록]



잠깐의 못된 심보를 참지 못한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애쓰는 의사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꿈틀대는 사람의 심리를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손에 땀을 쥐게 전해주는, 재능이 놀라운 슈테판 츠바이크를 발견한 올해는 저에게 잊지 못할 문학의 해가 되었습니다.


평전부터 에세이, 단편집과 유일한 장편이 한편 있다고 하는 츠바이크를 즐기는 재미가 인생의 또 다른 낙이 될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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