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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의 브런치 Nov 29. 2024

누구보다 살고자 했던 영혜

<채식주의자>의 영혜

3편의 연작에서 1인칭 화자인 적이 없던

영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내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남편.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제를

예술적 뮤즈이자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 형부.


그리고 영혜에게 방관의 가해자이자

본인도 피해자였던 언니.


영혜가 폭력에 일생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을 백 프로 이해할 수도 없다.

살아보지 않았기에.


그래도 또다시 갈음해 본다.

세 사람의 시선에 담긴 영혜의 마음을.

분명히 왜곡되었을 그 마음을 말이다.



어떤 마음으로 결혼했을까?

왜 그 남자를 선택했을까?

결혼당시에 남들 같은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없었을까?

정말 죽고 싶었을까?

꼬리를 물며 질문해 본다.



영혜는 누구보다 삶에 대한 갈망이 컸다.


그녀는 진정 살고자 했다.

그들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육식이란 폭력을 가하는 존재의 증거이기에 육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육식은 그녀의 삶에 마주한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의미였을 테니까.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채식주의자 p. 77>



그러면 채식은 비폭력인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생명을 먹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식물도 생명이다.

식물이 아닌 이상 모든 동물은 존재자체로

무언가의 생명을 해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그녀가 식물이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영혜는 누구에게도 폭력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동물 한 마리를 사냥한 인디언은

동물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은

악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살아야 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모든 동물이 무언가를 먹음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원죄에 가까운 일이니까.



다르게, 그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인디언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거나

자급자족하는 사회라면 무턱대고

저장하고자, 이윤을 내고자

사냥을, 사육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육식 자체가 아니라

식량이 산업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으로 이윤을 내야 하므로

공장화되고 물건처럼 과잉 생산되고

죽어가는 생명들.

결국 인간의 탐욕이 문제인 것이지 않을까?


물과 태양으로 흙 속에서

자생할 수 있는 식물이 되지 않고서는

비폭력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영혜는 그 누구보다 살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짓밟고 영혼을 빼앗은

폭력적인 존재들과는 다르게.


목말라. 물 줘.

나, 내장이 다 퇴화됐다고 그러지, 그치.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채식주의자 p223~224>



책의 내용들이 대중에게 충격적인 전개는,


우리 일상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것은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기에.

계속 기억되기를 바라기에.


<채식주의자>를 읽은 후에 우리는,

'읽기 너무 힘들다.'

'충격적이다'라는 느낌에서 한 발짝 나아가

우리 일상에 만연해있는 폭력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질문을 남긴 책이기에

불쌍하게 미친 영혜로 그치지 말고

늘 마음에 남아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폭력을 상기시키는

영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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