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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의 브런치 Nov 22. 2024

고독형을 선고받은 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폴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대신 당신에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39살,

파리의 아름다운 돌싱 인테리어 디자이너 폴이

이 여자 저 여자와 자고 다니며,

'나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이런 나를 오픈했으니 정직하다'는 로제 대신

시몽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이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이렇게

애달픈 마음으로 기억할까요?


그녀가 결국 로제를 택하고 다시 두려운 고독을 스스로에게 선고한 결말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네요.


얼마 전까지의 저였다면 폴이 답답하기만 했겠죠.

지금도 제 마음은 시몽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그 열정이 수명을 다해 꺼져버려 이별하게 되더라도 말이죠.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설 읽기를 결말짓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궁금해하는 사람의 마음을 작가의 치열한 작업으로 이렇게 온전히 글로 보여주었는데, 원래 내가 아는 편협한 세계의 기준에 따른 간단한 평가만으로 멈춰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속을 다 보여준 만큼 그 사람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했고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 보는 과정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분명 깊이 있게 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천천히 읽어내는 시간을 가지며 그녀  폴의 마음을 따라가 봅니다.


로제에게 교활함을 느끼면서도 보호받고 싶은 마음, 그의 바람을 쿨하게 넘겨야 하는 자신, 타들어가는 속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믿는 폴을 이해해보려 합니다.

시몽과 헤어지며 "이제 나는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마음과 상황을 헤아려보려 합니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폴에게 고독형을 선고한 시몽은 말합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해야 할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나를 사랑해 줘 하고 말입니다."


그 말에 그녀는 의지와 달리 속내를 털어놓죠.

"저 역시 그래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두려운 그녀는 보호를 원했습니다. 안정감을, 확신을 주는 관계를 바랐죠.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무엇일까요?


열정적인 사랑은 스물다섯 살의 시몽이 주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너무 어리고 책임감을 갖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시몽과의 데이트를 수군거리는 수많은 눈과 입들..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제와 다니면 든든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보는 듯했고 기댈 수 있을 만큼 듬직했습니다.


일과 쾌락을 좇느라 바쁜 로제와 다르게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을 보여주고 온종일의 시간을 자신을 기다리는 시몽에게 굴복하고 싶지만 세간의 눈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세상의 잣대를 무시하기에 그녀는 너무 여렸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시몽의 짧은 질문에

그녀는 자신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에게 자신 너머의 것을 살필 조금의 여유도 없다는 것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잃은 열정을 보여준 시몽의 사랑은

결국 다 죽어서 아무것도 남은 것 같지 않은

로제와 폴의 관계에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는 역할만을 하게 됩니다.



폴은 자유와 쾌락을 좇는 로제를

언제나 응원하는 말로 지지하지만

그 따뜻하고 안식 같은 폴에게서 얻은 에너지를

로제는 폴에게 쏟지 않습니다.


집에 데려다준 로제가 자신의 아파트로 함께 올라가지 않고 돌아서서 갈 때 폴이 느꼈을 허탈, 외로움, 상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그럼에도 그것을 사랑이라 믿고 다시 돌아간 그녀는

로제가 변할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아니었겠죠.


다시 그녀가 그를 기다리는 고독한 시간 속에서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그녀는 지금도 두려웠던 그 고독을 견디고 있겠죠?


그녀 폴에겐 두려운 고독보다

세상의 무서운 눈이 더 힘들 수 있다는 사실에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해되지만 안타까운 마음..

누가 도와줄 수도 없다는 사실.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몫입니다.


읽을수록 누구를 선택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폴은 홀로 서는 것 그것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을 듣고

과연 자신이 그 연주회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시몽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결정하고,


로제에게 다시 돌아가야 할지 말지를

그가 해주는 말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권을 늘 상대에게 넘겼다는 것.

그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만약 아직도 로제와 함께라면

반드시 고독할 것이기에 더욱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늙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눈가의 주름

팔자 주름도 없이 팽팽하고 날씬하지만

어떤 호기심, 열정도 없다면

과연 그것이 젊음일까요.


주름과 흰머리가 많지만

늘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있고

변화할 유연함이 있고

기꺼이 내 마음이 가는 것에

에너지를 쏟을 열정이 있다면

그것이 젊음 아닐까요.


그렇다면,

늙는 것이 두렵다면,

정말 늙지 말아야 할 것은,

거울 보듯 들여다봐야 할 것은,

얼굴보다 마음 아닐까요?


마음에 열정이 있으신가요?


나이 드셨다고 생각하시나요?


-욕망 없는 인생을 거부한다-

하고 싶고, 갖고 싶고, 도전하고 싶다.
이건 부끄러운 생각이 아니야.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할 일이지.
과한 것보다는 모자란 것을 걱정해.

---------프랑수아즈 사강  <지루한 전쟁>


무엇을 원하지만 나이가 걸리시나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이와 관계없이 욕망하셔도 됩니다.


여러분을 지지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말이

힘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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