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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의 브런치 Nov 08. 2024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대

<인간 실격>의 요조

"나는 배고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조의 이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목숨이 걸린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무조건 생존 본능에 의존한다. 생존본능은 빠르고 공정하다. 온유한 유전자보다 훨씬 강력하게 후세대로 물려 내려가는 생존본능은 언제나 필승의 패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본디 다르게 태어난 요조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있어 필승의 패 생존본능.

윤리도 의지도 아닌 태어날 때부터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우리 몸에 각인된 것.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요조는 어쩌면 그 생존본능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존본능이 없는 요조는 본능 앞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면 같은 갖가지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 부끄럼 많은 생이라고 여긴 요조의 삶이 문장마다 구슬프고 가여웠습니다.


1972년 우루과이의 럭비 팀을 태운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했을 때 추위와 배고픔 속에 생존자들은 72일 동안 극한의 상황에서 버티며 결국 구조되었습니다.


72일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미 사망한 동료들의 시신을 먹습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과연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다면 나 자신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내 이성과 상관없이 몸이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일들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그래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생존이야말로 필승의 패라고 한 것이겠죠.


배고픔을 모르는 요조가 이 상황이라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먹으려 했을까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보편적 인간이 될 수 없는 슬픔


이렇게 인간이라면 모두, 아니 대부분 필승의 패를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요조에게 그런 인간들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요조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 도깨비보다, 용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동물적 본성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가지고 있을 그것을요.


초원의 평화로운 소가 배에 붙은 등에를 꼬리로 쳐서 죽이는 것처럼 불시에 자신의 정체를 '화'라는 형태로 폭발시키는 인간의 모습에서 언제나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의 전율과 공포를 요조는 느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화는 신체와 마음을 빠르게 준비시켜 적 또는 위협에 대응하는 방어적 기제로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생존본능이 없으니 요조는 그런 화도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과 일반적인 대화도 불가능합니다.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그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스운 행동. 그 행동은 인간이 극도로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기에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죠. 우스운 행동으로 겉으로는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면서 속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조.


그 우스운 행동을 수단으로 인간과 가느다란 연결 고리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삶은 자살 시도와 술, 여자, 약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원래 행복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주인공과 친구의 대화죠.


"너 괜찮아?"

"응..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근데 왜 울어?"

"그냥...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좀 오래 걸렸습니다. 우울이 의지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무지한 제가 스토리로 변화하기 시작했죠.


우린 요즘 SNS로 타인의 삶을 접할 기회가 많습니다. 우연히 우울증을 앓았던 분의 글을 읽고 외형이 다르듯 마음도 다 다른 것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것을 계기로 제 세계관에 틈이 생깁니다.


그런 틈이 있었기에 레이디 버드의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라는 대사가 제 마음에 들어올 수 있었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만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외형이 다르듯 마음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제 생각에 심었기에 요조의 다름에 공감을, 아니 공감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름을 안다는 것의 가치


톨스토이가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에서 말했듯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사람도 그렇겠죠.


힘든 이유는 저마다 다 다릅니다. 제가 요조라는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고 그다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사람의 수만큼 마음의 수가 존재한다는 다양함의 인지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려는 마음을 다잡을 것이고, 다른 사람으로 연결되는 문을 열어주리라고 기대할 뿐입니다.


아무리 요조의 입장을 취해보려 하지만 한 끼만 굶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일반적인 사람으로 요조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의 절절한 심정을 써 내려간 인간실격을 통해 출구 없는 나약한 한 인간을 조금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부끄러운 생애가 아니라 마치 홀로 들키지 않으려는 외계종 같은 삶이었고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생애라서 책을 닫으면서도 아린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자이 오자무가 자신을 해부하듯 써 내려간 인간실격을 통해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들러의 말처럼 자신을 아는 것이 의지가 아닌 인지의 영역이라면 타인에 대한 앎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그 앎은 우리의 마음을 분명히 조금 더 확장해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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