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
지금 스스로 반국가세력이 된 한 사람도 한때는 시원시원하고 뒤탈 없이 일처리 하는 반장 엄석대 같이 평가되던 시절이 있었다.
밖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고 조직이 편안하게, 적당히 권력을 휘둘러가며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조직원을 편하게 하고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크고 작은 커뮤니티나 조직에서 귀찮은 일을 대신 나서주는 그들이 있다.
2024년 12월 3일 밤에 있었던 일을
'미쳤어, 광인이야'라고 넘기면 다음 뒤틀린 지배욕의 소유자에게 또 당하지 않을까?
그렇게 광인으로 치부하고 넘기지 말고 조금 더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다시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보려는 이유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기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게는 가정, 커뮤니티부터 크게는 한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살면서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요즘 실로 2024년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를 통해 지배욕을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지배욕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 자체는 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연선택된 기질이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지배욕, 권력욕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훌륭한 리더도 있고, 학부모 모임에서 대표를 자진해서 맡아주어 '누가 하지'라며 다른 이의 눈치를 보며 애를 졸이는 나머지 학부모들을 구해주기도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찾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당근에서 사교모임을 운영하는 이들이 대부분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지배욕의 소유자들이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라 지배욕, 권력욕 외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본성과 환경, 지능, 앎의 정도, 감정의 처리, 공감여부, 사회에 대한 인식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한 사람을 완성하고, 그 모습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사람을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면 믿을만한지 위험한지 정도는 스스로 가릴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뒤틀린 지배욕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도 사람 자체를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람만을 찾으려는 욕심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자초하고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는 어떤 사람인가?
엄석대 역시 대단한 권력, 지배욕의 소유자이다.
그는 직접 나서지 않고 감정도 잘 다스린다.
반항하던 한병태가 자신의 뜻에 따르면 억지로 끌려다녔다는 마음을 눈 녹듯이 없애주는 엄석대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을 만큼 교활하고 영리하다.
소설의 결말은 새로운 선생님, 즉 외부의 힘을 빌어서야 새로운 질서를 찾았다.
만약 현실에 엄석대 같은 인물이 있다면 꽤나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유는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능력 때문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라기보다 감정까지 이용하는 교활함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래서 그의 권력이 유지되는 힘을 견고히 할 수 있었으리라.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한 사람은 어떠한가?
그동안 살면서 느낀 건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참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끼리는 아주 잘 알아보고 서로 잘 어우러진다.
지배욕, 권력욕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또 그들끼리는 주종관계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주종관계가 한번 자리 잡으면 충성을 한다.
서열이 확고하다.
서열이라는 것 자체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용산의 부부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둘이 만나서 서로를 알아보고 주종관계도 확실하게 잡혀있다.
그리고 그는 귀가 닫혔다.
스스로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은 거의 없다.
편협한 세상에 갇혀 자신만의 세상을 살고 있다.
내가 속한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다.
공동체 의식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너무 큰 문제가 아닐까?
그 말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다.
메타인지도 안된다.
아무리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많아도
메타인지가 가능해서 사회를 바라볼 줄 알면
스스로 자신을 검열할 줄 안다.
그대로 사회에 나가면 돌 맞을 행동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직 자기 부부의 이익이냐 아니냐만이 그의 선택의 유일한 고려 사항이다.
감정의 처리를 스스로 할 줄 모른다.
감정은 배설하듯 그냥 쏟아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할 의지가 없다.
이렇게 이미 심각하게 사회적으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인성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시민인 내가 봐도 보이는 이런 성격들을 진정 측근들은 몰랐을까?
동료, 선후배는 같이 일하면서 몰랐을까?
대통령 후보 전만 해도 그와 가족을 둘러싼, 오직 돈을 위한 각종 비리들은 충분한 정보가 세상에 나와 있었다.
어느 당을 지지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이 하는 말 말고 스스로 선택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끝을 보고서야만 인정해야 할까?
피할 수 없이, 삶은 생존이다.
삶은 개개인의 싸움이고
세상도 세력의 싸움임은 피할 수 없다.
정치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살아가려면 내가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누구에게 선택을 맡기지 말고 혼자 힘으로, 함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미쳤다고 치부하고 끝내면 절대 안 된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엔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사람을 가려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시원시원하니까 뭐든 잘할 거야.
지배욕이 있으니까 욕심이 많을 거야.
밥을 잘 사니까 좋은 사람일 거야.
조용조용하니 큰일은 못할 거야.
등등의 단편적인 판단들.
이런 단순한 평가로 사람을 판단하고 끝내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을 주변에 초래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지배욕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총체적인 한 인간을 보려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혼자서도 오롯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가 오롯한 사람이 돼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첫 번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눈.
지배욕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도 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내 주변에 늘 있을 것이다.
가족 중에, 동창 중에, 사교 모임에, 직장에, 정치인 중에 반드시 있다.
우리는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일부러 관심을 들여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지배욕만에 충실한 사람인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임을 아는 사람인지 그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고통을 또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도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선택기준을 따라가 보면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본다. 인간이 스스로 살 궁리를 하는 것은 매우 본능적이다. 그러나 자신만이 살 궁리를 하는 것, 다른 이를 희생해서라도 자신만을 살리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공감능력은 단순히 같이 맞장구쳐주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는 댓글이 공감이 아니다.
존재를 느끼는 마음이다.
타인의 아픔까지 보려고 하는 능력, 즉 공동체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에겐 그것이 없다.
그러면 어떤 선택이든 가능하다.
그것이 혼자만 생각하는 것의 무서움이다.
내가 타인을 살릴 수는 없어도 그런 타인의 존재를 인식할 수만 있으면 개인의 선택은 달라진다.
오직 자신의 욕망 만을 생각하는 이가 권력을 가졌을 때 그것은 주위를 모두 파괴시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