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거짓말 잘 못하고
몰래 치사하게 혼자 득 보는 것도 잘 못하고
신세 지는 것은 더 싫고
비겁하고 교활한 행동을 보면 참기 힘든 나인데..
왜 이런 착한 내가
늘 손해만 보는 것 같지?
이런 생각 자주 드시나요?
여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의 주인공이 그래요.
늘 손해만 보고 삽니다.
하나뿐인 형은 천성이 아주 교활하기에 장기를 둘 때도 비겁한 수를 쓰기 일쑤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열흘에 한 번꼴로 싸움을 했죠.
그런데도 부모님은 형만 예뻐했습니다.
둘째인 주인공 도련님에게는
'사람 구실 하긴 그른 놈'
'앞으로 뭐가 되려나 몰라'라는 말을 했죠.
오직 가정부 기요 할머니만이 도련님을 끔찍이 챙겨주었습니다.
도련님의 타고난 성품은
대쪽 같고 치사하게 이득 보는 짓을 하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못합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비겁한 인간이 아니기에 의리가 중요합니다.
한번 약속하면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비열한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타고나길 막무가내고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한번 마음먹으면 그대로 밀어붙이고
평판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귀찮은 일을 못 참는 성격이고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일도 없습니다.
착하디 착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쓰일 수 없습니다.
도련님의 첫 사회생활
그런 도련님도 졸업을 했으니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죠.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형이 집을 정리해 나눠준 돈으로 졸업을 했으니 이제 생업에 나서야 합니다.
살던 도쿄에서 먼 시골 학교에 선생님 자리를 제안받고 떠나게 됩니다.
첫 직장생활을 마주한 도련님에게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 모두의 고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활하고 비열한 사람은 형만이 아닙니다.
어디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에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죠.
첫 직장인 학교에서
교장, 교감선생님부터 동료선생님
그리고 학생들, 동네 사람들까지
많은 관계를 마주해야 합니다.
특별한 스토리가 아닌 우리의 일상 같은 사소한 일들로 관계의 힘듦을 보여주는데 역시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구나..싶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
반면 기쁘게 하는 것도 사람이겠죠.
좋은 사람과 함께 가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큼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힘들다고 회피해서는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어느 누구도 얼굴과 겉모습만으로는 도대체 그 사람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직접 시간을 두고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인데
주인공은 사람 한 번 보고 바로 별명을 붙이고 좋고 나쁜지를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촌구석 천민들하고는 태생부터 다르다는 오만함도 지니고 있습니다.
시시콜콜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냥 넘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욱하는 감정을 그대로 분출합니다.
다른 사람말만 듣고 예의도 없고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사람이 결국은 자신과 같은 마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략을 꾸미기를 서슴지 않고 아첨과 이간질을 일삼는 교활하고 비겁한 선생님들에게 응징을 합니다.
그리고 둘은 그 학교를 떠나죠.
둘은 마음이 후련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그 교활하다는 사람들은 학교에 남아 일상을 살아가겠죠.
계략을 일삼는 사람들은 눈에 가시 같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게 되었으니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게 된 거죠.
스스로 정의롭고 착하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새로 직장을 구해야 합니다.
또 말 한마디 못하고 착하디 착하기만 한 선생님은 더 먼 시골로 전근을 가게 됩니다.
결국 남는 사람들은 교활하고 아첨하고 비열하다는 사람들.
착한데 매번 손해 보는 이유?
무엇이 문제일까요?
주인공은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고 믿어요.
불같이 끌어 오르는 감정을 토해내고 본인 속만 후련하면 그것이 정의일까요?
타고난 태생 즉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교활하게 태어난 사람은 교활합니다.
착하게 태어나서 불쌍한 사람 보면 뭐든 도와주고 싶은 사람 본성도 바뀌지 않습니다.
겉모습만으로 속을 알 수 없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상대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 속에 아무리 착함이 있어도
내가 보여주는 모습이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이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대쪽 같음이라면 그것은 상대에게 아집과 고집으로만 보일 것이에요.
교활함, 비열함도 단번에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학습된 교활함은 더욱 알아보기 어렵겠죠.
책 속에 이런 말이 나와요.
물론 나쁜 짓을 안 하면 되지만 자기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요, 아무리 통이 큰 것처럼 보여도, 아무리 뒤끝이 없어 보여도, 친절하게 묵을 집을 알선해 준다 해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어때요?
너무 좋은 말이죠.
그런데 저 말을 누가 하는 줄 아세요?
바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해주는 말이랍니다.
관계는 그래서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혼자서 동굴 속에 숨어 사는 것이 좋고 그럴 수만 있다면 관계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우리가 노인문제를 생각하면 빈곤을 먼저 떠올리는데 실상은 빈곤하지 않은 노인들도 많이 계시죠.
그분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무위"라고 합니다.
이룬 것도,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는 무위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직접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고
SNS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소설로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면서
가장 드는 생각은
내가 바뀌어야 관계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먼저
정제되고 공동체라는 인식을 갖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단번에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겪어보려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모두를 품기 위함이 아니라
나와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요.
그것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분들이라면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본성을 마주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어떠세요?
관계에 자신감이 생긴다면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의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서 자신을 알게되어야, 똑같은 과정으로 타인도 천천히 바라볼 여유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