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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태어난 다람쥐처럼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by 김타닥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들지?
왜 본인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나,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정신과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눈만 껌뻑였다. 그 정신과를 다닌 지 몇 개월 안 됐을 때의 일이었다. 내 과거사와 집안사정을 다 듣고, 그로 인해 비롯된 병증을 빠른 속도로 타이핑해낸 후에 선생님은 한탄하듯 저런 말을 했었다.


이런 유의 질문은 처음이 아니었다.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하는 질문이건, 타인에 의해서건 저런 말들을 듣게 되는 삶이 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간이 흐르며 자연히 그에 대한 답이 쌓여갔고, 정신과 선생님에게도 했던 답변을 여기에도 옮겨본다.


"저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났을 거라곤 생각 안 해요. 저는 그냥 사막에서 태어난 다람쥐 같은 거죠."


(사실 이때는 사막에 실제로 다람쥐가 사는지 안 사는지에 대한 배경 지식은 없었다.)


"다람쥐라면 다들 먹을 것도 많고 오를 나무도 가득한 떡갈나무 숲에서 태어나고 싶을 거예요.

덥고 마실물도 없고 살기도 팍팍한 사막에서 누가 태어나고 싶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나도 떡갈나무숲에서 태어날걸, 떡갈나무숲에 사는 다람쥐는 좋겠다. 나는 왜 거지 같은 사막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살지? 한탄해도 제가 사막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냥 사는 거죠. 사막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생각보단 살만해요. 별도 예쁘고요."


그러니까 나는 사막에서 태어난 다람쥐처럼.


사막에서 태어난 것을 비관해 말라죽을 생각은 없었다. 때가 되면 물을 찾고 바람을 피하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 적 또한 없었다. 사막을 헤쳐가다 만난 여러 군상들이 내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학창 시절 편지 쓰기 대회를 하는데, 반친구가 자기 엄마에게 편지를 쓰다 와앙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자기 엄마가 너무너무 불쌍하다고. 엄마에게 편지를 썼던 모양이었다. 그 애의 집은 이혼가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일에는 엄마와 함께하고, 주말에는 아빠랑 데이트를 한다며 종종 아빠와 다녀온 예쁜 카페 내지는 전시회의 사진을 보여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뭐 라그랬나. 근처 자리에 앉아있다가 눈을 마주친 내게, 네가 부럽다 했던 기억이 있다. 난 모를 거라고. 그런 요지의 말을 하며 엉엉 울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던 점은 나는 그로부터 몇 년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다. 암이었다.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친한 한두 명을 제외하곤 굳이 반아이들에게 밝히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몰랐던 그 애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애가 사막이라고 믿는 떡갈나무 숲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내 사막이 누군가의 떡갈나무 숲이었던 적 또한 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다닌 영어학원.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나는 일상과 학업으로 복귀했다.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둘만 남을 기회가 생기자 내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머니만큼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지만 어린 날의 이야기는 생생했다. 아빠가 죽었으면 하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아빠가 너무너무 싫어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그것이 아빠가 죽었다는 내용이기를 기도했다고 했다. 모르는데서 사고가 나면 거기서 아빠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간절하게 바란 것은 아빠의 죽음이었다고. 그러니 자기는 죽었을 때 슬퍼할 아빠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부럽다고. 돌아가셔서 슬퍼할 아빠가 있다는 것 또한 복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소중한 기억을 가진 나의 유년은 그 선생님이 가지지 못한 떡갈나무 숲이었다.


물론 오롯한 떡갈나무숲에 사는 삶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인생의 큰 굴곡도 없이, 아주 작은 굴곡도 커다래 보일만큼 아름답고 커다란 떡갈나무 숲에서 살아가는 삶이, 세상 어디엔가는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는 굳이 그것을 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련다.


그러니 오늘의 사막을 사는 다람쥐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넘치는 싱그러움도 풍성한 먹이도 없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많이 힘들겠지만, 별을 보고 반짝이는 모래를 보려고 노력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좀 살만한가 싶으면 모래바람이 일고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이곳에서 자란,

가다 보면 오아시스도 만나고 별이 예쁜 밤도 마주치지만, 기본적으로 거칠고 뜨거운 이곳에 사는,

우리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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