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살, 아직도 어른이 아니라면
글을 오래도록 쓰지 않았다. 남모르는 곳에서 인스타툰도 시작하고 소개팅도 몇 번이나 하고, 살도 8킬로나 감량했지만, 글을 오래도록 쓰지 않았다. 모은 돈은 아직도 없고-병원비와 더부살이 고양이가 좀먹은 부분은 차치하도록 하자-, 건강은 나빠진 부분과 좋아진 부분이 공존한다. 나빠진 부분으로 인해 몇 날 눈물을 쏟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부분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꼭 뭔가를 기도하는 사람처럼 요가를 하고 헬스를 하고 수영을 하며 내 몸을 견뎌낸다.
지지부진한 나의 나날들아. 한 번은 소개팅 상대가 어마무시한 외제차를 몰면서 다 닳아서는 모시옷처럼 발바닥이 비치는 양말을 신고 나오며, 햄버거 집에서 값을 치르며 그것이 비싸다 투덜거린 적이 있더랬다- 한강 피크닉을 하고 싶은데 내가 먹거리를 사 왔으면 좋겠다는 말에 내가 그러마 했고, 큰 가방을 가득 채울 만큼 한 꾸러미 듬뿍 먹거리를 사갔던 내게 그가 그 답례로 밥을 사는 자리였다-. 차라리 그가 연비가 극히 효율적인 아주 작은 승용차를 타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를 이해했을 것이었다. 타고나길 검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비가 나쁘기로 유명한 요란한 차를 몰며 첫 만남 자리에 햄버거가 비싸다고 상대 면전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지라 조금 놀랐더랬다.
나라면 다이소에서 양말을 사 신더라도 초면에 다 해진 양말을 보여주기는 부끄러웠을 텐데. 기념일에나 갈 만큼 비싼 식당이 아니라면, 초면인 상대방의 면전에 대고 밥이 비싸다는 둥 하지는 않았을 텐데. 가치관의 차이인 걸까. 대화는 즐거웠으나 그와 나 사이에는 건너가기 어려운 어떤 거대한 유격이 있음이 분명했다.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는 너만큼 행복하게 그걸 먹을 자신이 없어. 더 행복하게 먹는 사람이 먹는 게 옳아. 넌 그걸 아주 행복하게 먹을 수 있잖아. 라며 자기 몫의 마지막 초밥을 양보하던 친구. 결혼을 하면 꼭 아침밥은 함께 먹고 싶다고 말했던 아빠를 위해 심하게 싸운날에도 아빠를 위해 꼭 아침밥을 차렸다던 엄마. 뭐 그런 것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사랑은 그런 것들인데. 그런 형태의 사랑을 다시 찾는 게 가능한 일인 걸까.
한 번은 심리상담사분이 아직은 어른 1학년에 가까운 나이,라는 말을 했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 가정을 책임지고 자아를 성찰하며,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관리에능한-은 40대나 되어야 이룰 수 있는 그것이라먀, 아직 그렇게까지 동동거릴 필요가 없다, 뭐 이런 요지의 말을 해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요? 내가 상상한 스물일곱을 사는 사람들이 어디 엔간 있는 것도 같은데. 저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비교는 나쁜 거라지만 스스로 기대하는 스스로의 모습이란 건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도대체 언제쯤 어른이 될는지. 아직도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