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학습준비물을 구입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학습준비물 구입비'라는 예산 항목이 있고, 학년 초에 학교에서 제공하는 학습준비물 목록을 안내한다. 학습준비물에 대한 학부모의 심리적,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어릴 적 미술시간이 든 날이면, 학교 앞 문방구에 줄을 서서 미술 준비물을 구입해야 했다. 내가 정확히 뭘 가져가야 하는지 몰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문방구 아주머니가 내 준비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학교 앞 문방구도 없고,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준비물도 거의 없다.
이러한 행정은 꼭 필요한 조치이다.
사절 도화지 몇 장 사가지고, 구겨지지 않게 가져가는 수고를 아는가.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했을 때의 무안함과 두려움은 끔찍한 것이었다. 또한 준비하지 못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것이라면, 이는 어린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가 학습준비물을 사서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학습준비물을 제공할 수는 없다.
예산의 사용 목적이 수업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수업 시간에 사용되어 소모되는 물품을 구입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개인의 소모되지 않는 물건들, 이를테면 가위나 색연필 등(색연필은 소모되기는 한다)을 구입해서 나눠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예산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살 수는 없다. 경기도교육청은 1인당 3만원 내외로 예산을 편성하기를 권장하고 있는데, 학교 전체 예산으로 생각하면 금액이 크지만, 1인당으로 보면 그리 큰돈은 아니다.
보통 분기별로 학습준비물 목록을 만들어서 물품을 구입하는데, 학년 선생님들이 다 모여서 교과서를 다 펴 놓고 어떤 것이 필요한지 정한다. 요즘은 물가가 엄청나게 올라서 필수적인 교육 활동만 겨우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 외의 것을 가르치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가.
이를테면 아이들에게 파스텔화를 가르치고 싶은데, 학습준비물로 파스텔을 다 사줄 수는 없다. 돈도 모자라고, 개인 물품을 사줄 수 없기 때문이다. 파스텔은 비싸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져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통 학급운영비를 쓰거나 교육청에서 나오는 예산을 따와서 사거나, 혹은 좀 부족해도 모둠별로 1,2개만 사서 같이 쓰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나같이 가르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은 보따리장수처럼 짐이 한가득이 된다. 내 짐은 수많은 보드게임과 파스텔, 깎는 색연필, 이미지 카드, 동시집, 핸드벨 등 없는 것 없는 만물상이다. 보드게임도 반의 모든 아이들이 같은 게임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가지고 있고, 70여 권의 문학동네 동시집도 들고 다니며, 오일파스텔과 색연필도 아이들 숫자 이상으로 들고 다닌다. 겨울에는 캐럴을 핸드벨로 함께 연주해야 하니, 그것도 들고 다니고... 거의 이삿짐 상자로 7~8박스를 들고 다니는 것 같다. 전적으로 가르치고 싶은 것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못 하는 경우는 용납을 못하는 나의 성질머리 때문이다.
그럼 어떤 것을 학부모가 준비해줘야 하는가.
일단 자연물 꾸미기라든가, 재활용품을 활용한 만들기 같이 각자 다른 것을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초등 저학년 교과서에는 유독 이런 활동들이 많은데, 2학년 자연 교과서나 물건 교과서에는 이런 활동들이 특히 많다.
예를 들어 주변에 있는 나뭇잎, 꽃, 돌 등을 활용해서 꾸미는 미술 활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풀이나 꽃은 미리 따놓으면 시들어버리니까 전날 저녁이나 당일 아침에 채취할 수밖에 없다. 또한 공원 등에서 기르는 것을 따오면 안 되기 때문에 준비가 어렵다. 그래서 일주일 전부터 안내를 시작한다. 설명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해야 한다.
당일이 되었다. 한 3분의 1 쯤 되는 아이들은 빈 손으로 와서 당당하게 말한다. '없어요.' 끝. 그리곤 당당하게 나에게 요구한다. 달라고. 예전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빌리거나 하는 노력이라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없으면 그냥 준비해주어야 하는 이상한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수업이 있는 날에는 큰 봉지를 들고 공터를 다니며 꽃과 잎을 채취하곤 한다. 하늘을 보며, 세상이 바뀌었으면 맞춰야겠지 하고 되뇐다.
진짜 화나는 것은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아이들이 내가 준비한 잎이나 꽃이 안 예쁘다고 따지기 시작할 때이다. 어디서 본 것이 있는지 2학년이 말투도 참 앙칼지다. 순간 불량품을 팔아버린 마트 직원이 된 느낌이 든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어른들 잘못이지.
다음으로 학부모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개인 물품이다.
필통에 들어가는 것, 이를테면 연필, 지우개, 자 같은 것들과 색연필, 사인펜, 가위, 풀 등의 물건은 각자 준비해야 한다. 수업을 하다가 쓰세요 하고 말했는데, 안 쓰는 아이가 있어서 보면 연필이 없다. 연필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닌데, 늘 연필이 없다.
수업은 해야겠고, 학급 공용 물품으로 연필, 지우개, 가위, 풀 등을 준비하였다.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공유지의 비극'이다. 부러져 있는 연필, 잘라놓은 지우개, 풀 찐득이 등을 볼 수 있다. 각자 자기 물건도 잘 관리하지 않지만, 진짜 공용, 자기 것도 아니고 친구 것도 아닌 것은 정말 아무 거리낌 없이 훼손한다.
물건은 아껴서 써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요. 이런 것들은 정말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가정교육을 바탕으로 도덕교육을 하는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는 쉽지 않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정말 어디까지 준비해 줘야 하는가.
종종 교무실로 '그런 것은 좀 학교에서 준비해 주세요.' 하는 학부모의 전화가 온다. 예를 들면 리코더가 없어 우리 아이가 수업에 참여를 못 했단다. 입을 대는 리코더를 공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고, 그럼 학교에서 개별로 다 사달라는 것인지, 복지의 끝은 어디인지 모르겠다.
무상 교육은 보편 교육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행복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복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이 든다.
과학 실험 도구를 가지고 와서 이거 집에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부터 고쳐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