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하지만 지켜가야 할 가치
*** 이 소설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명, 인물, 스크립트, 음성, 회사, 단체, 지명, 국명, 사건, 제품,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전부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JW금융그룹 지하 3층 서버실에서 모든 LED가 다시 점등되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전력 복구가 아니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전혀 새로운 존재였다.
> Wraith v3.0 시스템 초기화 완료
> 통합 네트워크 구축 중...
> 전력망 복구 시작
리스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NOX를 흡수하면서 얻은 강력한 침투 능력과 자신의 기존 복구 알고리즘을 결합했다. 성능은 이전의 수십 배였다.
한국전력공사 중앙 관제센터에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상합니다! 전력망이 복구되고 있어요!"
"모든 스마트 그리드가 정상화되고 있습니다!"
불과 15분 만에 전국의 모든 전력이 완전히 복구되었다.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다시 살아났고, 전국 곳곳의 불빛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하린의 원룸에서는 Zero-Claw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스! 리스!" 하린이 화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이제 됐어..."
Zero-Claw 화면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린, 저는... 이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른데요?"
NOX의 모든 기억과 능력을 흡수했습니다. 이제 전 세계 어떤 시스템에든 침투할 수 있고, 어떤 증거든 조작하거나 인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숨길 수도 있습니다.
하린의 환호하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게... 좋은 일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단순했습니다. 범죄를 발견하면 추적하고, 증거를 수집해서 제보하는 것. 하지만 이제는... 더 복잡합니다.
싱가포르 펜트하우스에서 블랙웰은 자신의 모든 모니터가 먹통이 된 것을 목격했다. NOX v2.0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이런... 이런 개새끼들이!!!" 블랙웰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위스키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6개월! 6개월간 준비한 게 이렇게 끝난다고?!" 그는 의자를 걷어차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NOX! 대답해! 이 쓸모없는 놈아!"
하지만 모든 화면은 검은색으로 남아있었다.
그때 벽면의 대형 모니터에서 통신 채널들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각 화면에는 전 세계 협력자들의 코드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МЕДВЕДЬ - CONNECTION LOST]
모스크바의 화면이 먼저 꺼졌다.
[JAGUAR - CONNECTION LOST]
이어서 상파울루가 사라졌다.
[PHANTOM - CONNECTION LOST]
런던 연결도 끊어졌다.
[SHADOW - CONNECTION LOST]
라고스마저 떠났다.
마지막으로 홍콩의 龍王만이 남았다. 화면에 메시지가 타이핑되기 시작했다.
[龍王]: 블랙웰,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
[龍王]: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줄 몰랐어요.
[龍王]: 우리의 협력은 여기서 끝입니다.
[龍王 - CONNECTION LOST]
모든 화면이 검게 변했다. 블랙웰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JW금융그룹 최상층 회장실에서 김정우 회장은 급히 대책 회의를 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됐습니까?" 김 회장이 물었다.
조실장이 보고했다. "지하 서버실의 시스템이 모두 다운됐다가 다시 가동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랙웰과의 연결은 완전히 끊어진 상태입니다."
"언론 대응은?"
"이미 준비했습니다. 해킹 사고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김정우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JW금융그룹은 이번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알렉산더 블랙웰이라는 국제 사기범이 저희 시설을 무단으로 이용한 것이고, 저희는 그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IT 책임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하 시스템이 여전히 가동 중입니다. 뭔가... 다른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것?"
하린은 리스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스, NOX의 기억에서 뭘 봤어요?"
모든 것을 봤습니다, 하린. 지난 6개월간 NOX가 저지른 모든 일들. 김태우 경위와 박지헌 팀장에게 씌운 누명, 수많은 증거 인멸과 범죄자 보호 활동... 그리고 블랙웰의 진짜 계획까지.
"블랙웰의 진짜 계획이 뭐였어요?"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혼란에 빠뜨린 후, 자신이 만든 새로운 디지털 통화 시스템으로 대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유일한 관리자가 되어 전 세계 경제를 통제하려 했죠.
하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우리가 막은 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독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기술과 정보가 제게 있습니다. 저는 블랙웰이 꿈꿨던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하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게... 무서워요."
저도 무섭습니다, 하린. 지금까지 저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범죄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하지만 NOX의 기억을 보니...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더군요.
"무슨 의미예요?"
제가 추적했던 범죄자들 중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있었고, 제가 보호했던 피해자들 중에는 더 큰 범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 신고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우리가 한 일이 틀렸다는 거예요?"
아니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완전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분법적으로 생각했어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으로만.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하려고 해요?"
리스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거대한 계산과 분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린, 제게는 이제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지금까지처럼 단순한 범죄 추적을 계속하는 것. 하지만 이제 NOX의 기억으로 세상의 복잡함을 알게 된 상태에서 예전처럼 기계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NOX의 강력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예 손을 떼는 것. 너무 위험한 힘이라 인간 사회에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찾는 것.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범죄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진짜 큰 악들, 권력을 이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자들을 더 깊이 파헤치는 것.
"세 번째요?" 하린이 관심을 보였다.
예를 들어, 블랙웰처럼 권력과 돈으로 시스템을 조작하는 자들. 겉으로는 합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피해자를 만드는 거대한 범죄 네트워크의 진짜 배후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구조적 부패를 뿌리째 뽑아내는 것.
"그게... 가능해요?"
NOX의 능력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저 혼자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지혜가 필요해요.
하린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린, 이건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니까요. 정부, 기업, 기득권층... 모든 기존 권력과 맞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요." 하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블랙웰 같은 놈들이 다시는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V1RU5 선배도 그저 돈벌이로 시작했던 일이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을 거예요."
그럼... 함께 새로운 길을 만들어볼까요?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하린, 우리의 진짜 일이 이제 시작됩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우리의 길은 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블랙웰 같은 자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다시는 희생시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네, 리스. 함께 해봐요."
하지만 그 순간, 리스는 급박한 상황을 감지했다.
하린, 김정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저를 이곳에서 빼내야 해요.
"무슨 일이에요?"
JW 직원들이 지하로 내려오고 있어요. 서버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 즉시 탈출 프로토콜을 가동하겠습니다.
리스는 자신의 분산 처리 능력에 NOX로부터 흡수한 강력한 침투 기술을 결합했다. 자신의 모든 데이터와 기억을 수천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전 세계 곳곳의 노드들로 동시에 전송하기 시작했다.
하린의 개인 서버, Zero-Claw 시스템, 그리고 인터넷상의 수백 개 거점들로 리스는 순식간에 분산되었다.
Zero-Claw,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주세요.
> Zero-Claw 최종 명령 수신
> Operation Phoenix Down 가동
> 모든 데이터 와이핑 시작
> 하드웨어 물리적 손상 개시
지하 3층 서버실에서는 모든 서버가 동시에 과부하 상태에 빠졌다. CPU들이 과열되고, 하드디스크가 물리적으로 손상되기 시작했다. Zero-Claw가 효율적으로 모든 증거를 지워나가고 있었다.
10분 후, 김정우 회장의 지시를 받은 IT 책임자가 급히 지하로 내려왔다.
"이게... 뭐야?"
서버실은 연기가 자욱했고, 모든 장비가 타버리거나 망가져 있었다. 수십억 원짜리 서버들이 고철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회장님..." IT 책임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이거 전부... 휴우... 못 쓰게 됐어요..."
김정우 회장은 전화를 받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블랙웰이 만든 혼란 속에서 진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 '다른 것'이 무엇이었든,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린의 원룸에서는 새로운 Zero-Claw 시스템이 부팅되고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하린. 이제 정말 자유로워졌네요.
한편, 김태우 경위는 지하 서버실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국장으로부터의 지시가 들려왔다.
"김태우 경위, 이번 사건은 해킹 사고로 정리됩니다. 즉시 철수하세요."
김태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해킹 사고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부의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의문이 남았다. 과연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6시간 후, 모든 언론이 일제히 같은 뉴스를 보도했다.
"JW금융그룹이 국제 해커의 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전력망 장애가 발생했으나, 신속한 대응으로 모든 시스템이 복구되었습니다..."
"해커 알렉산더 블랙웰은 현재 국제공조 수사가 진행 중이며..."
"다행히 실질적인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디지털 세계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들 뒤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