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냥 '사람'하겠습니다.

개인적 선언 - 역할 없이 하느님 앞에 서는 일에 대하여

by 방덕붕

어제 미사에서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왜 그렇게 살지 않느냐. 너희는 가난하지 않다. 집도 있고 차도 있지 않느냐.

그 말을 듣는 동안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빛과 소금을 찾으니 너희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면 — 나는 그냥 사람하겠다고.


선언과 당위 사이


마태오 5장에서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이미 그렇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강론에서 그것은 당위가 되었고, 거기에 물질적 조건이 끌려 들어왔습니다. 집이 있다. 차가 있다. 그러나 너희는 충분히 나누지 않고 있다. 복음의 언어가 심판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말 앞에서 늘 묘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것이 틀린 말이라서가 아닙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거부감의 정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그 자리가 만들어내는 구조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관리되는 신비


천주교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가 원래 신비한 것 아닙니까? 미사 때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믿는 것, 이것이 신비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부활, 성령, 삼위일체. 이 모든 것이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교회가 경계하는 것은 신비 자체가 아닙니다. 개인이 신비를 직접 경험하고, 그것을 직접 해석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공인한 성인들의 신비 체험은 올바른 신비가 되고, 개인이 "나는 하느님을 직접 만났다"고 하면 위험한 신비가 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십자가의 요한도 살아생전에는 의심받았습니다. 교회가 나중에 인정하면서 비로소 정당한 신비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신비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의 문제입니다. 개인과 하느님 사이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면, 중개자로서의 교회는 존재 이유를 잃습니다.


검증 불가능한 부르심


성직자가 되는 것. 교회가 인정해준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검증 불가능한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닌데, 하느님이 너를 안 부르셨는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면책특권처럼 작동합니다. 내가 부족하더라도, 내가 본분을 잊더라도, 나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니까. 너희와는 다르니까.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은 사제의 의무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봉투의 두께를 재는 성직자를 저는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사람이, 죽음 앞에서 돈을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탁자를 뒤엎은 사람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사람입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상인들의 탁자를 뒤엎은 사람입니다. 당시의 종교적 권위 —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성전 체제 — 를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의 이름으로 세워진 제도가, 다시 사람 위에 제도를 놓고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 군림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것을 지적하면 신앙이 부족하다는 말이 돌아옵니다.


가장 정직한 신앙


저는 빛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소금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는 역할을 맡아서 수행하는 것,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연극입니다.

그냥 사람이고 싶습니다. 부족하고, 의심하고, 때로는 미사 중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하느님 앞에서 "나는 빛도 소금도 못 되겠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오히려 위험한 것은 "나는 빛과 소금이다"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자의식이 남을 심판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제 그 강론처럼.


신앙이 관계라면, 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할극이 아니라 솔직함입니다. 검증 불가능한 부르심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섬김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봉투의 두께를 재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사람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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