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04>주근깨 소녀, 최성민(1)

by 랑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욕실에서 빨래하던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여학생들은 병실청소를 했다. 아니 청소는커녕 수다떨기에 바빴다. 오랜만에 외부인을 만난 환자들은 쉴 새 없이 저마다 사연을 늘어놓고 있었다. 대부분은 소싯적 자랑이야기였다. 사람은 추억을 평생 먹고 산다더니 꼭 맞는 말이었다. 모처럼 신난 환자들의 모습에 여학생들은 뿌리치지도 못하고 마냥 붙잡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식사하시래요.


성민이 병실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치고 나서야 소녀들은 해방될 수 있었다. 때마침 욕실에서 빨래하던 두 여학생들도 막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성민은 한 번 더 식사시간임을 고지했다.


김성민? 네 이름이 김성민이라고 했지?


아까 욕실에서 시트를 빨다 꺄르르 웃던 주근깨 여학생이 성민에게 불현듯 말을 걸었다. 다짜고짜 반말로. 성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랑 동갑 맞지? 나는 최성민이야. 우리 이름도 나이도 똑같다. 그치?


주근깨 여학생은 아랑곳 않으며 성민에게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얼른 식사하시래요.


성민은 우물쭈물 그 말만 하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별로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말을 섞었다가는 시답잖은 질문들이 줄줄이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고싶진 않았다.


그런데 공책 뒤에 적힌 건 뭐야? 방명록 맞지? 저기 휴게실에 있는 연두색 공책 말야.


최성민이라는 주근깨 가득한 못 생긴 여학생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눈망울까지 반짝였다. 아무래도 휴게실 책꽂이에 꽂아둔 연두색 공책을 벌써 읽어본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성민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게 저.. 친구들...인데...


성민은 괜히 말을 얼버무렸다. 이에 최성민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환하게 미소지었다.


으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친구만 거기에 적을 수 있단 거지?


그리고 뭐가 신났는지 총총거리는 발걸음을 하고는 뒤돌아 식당으로 향했다. 성민은 이 상황이 당혹스러워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방명록 같으면 조용히 글을 남겨두면 될 일이지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또 뭐람. 예쁘지도 않은 얼굴로 저 자신감은 또 뭘까. 참 알 수가 없는 여학생, 아니 최성민이었다.


푸.


이윽고 병실에서 나오던 한 여학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들은 순식간에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들 웃음이 터졌다. 결국 시선 처리가 부자연스러워진 쪽은 성민이었다. 온몸의 혈관이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성민은 여자라는 앙큼한 존재들과는 말을 섞고 싶지가 않다.


저희가 보면 안 되는 건 아니죠? 최성민 쟤 벌써 방명록도 적었어요. 아주 열심히 적던데. 푸핫.




성민은 남자답게 생긴 이목구비에 씩씩한 기운을 가졌다. 그래서 이곳에 봉사활동을 오는 여학생들 가운데 꼭 한 두 명은 성민에게 이성적 호감을 가졌다. 그걸 성민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물론 가끔은 첫눈에 반하는 여학생이 오기도 했지만, 현재 성민의 인생에서 여자친구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성민의 연두색 공책에 방명록을 남기며 마음을 표현했다. 공책을 읽으라고 한적도 없는데 희한하게 다들 그것을 잘도 찾아냈다.


연두색 공책의 앞쪽에는 성민의 사연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성민이 과거 딱 한 번의 실수로 꽃동네와 연을 맺게 된 이야기였다. 성민은 사회봉사 명령을 형벌로 받게 되어 처음 이곳에 왔고, 지금은 약속된 시간을 모두 채웠지만 학교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이곳에서 더 지내기로 한 것이었다. 성민은 반강제로 자퇴를 했고, 꽃동네에 왔으며, 하루살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도 공책에 적어두었고, 누군가 그 뒤에 이어서 힘내라는 메모를 적으며 릴레이 방명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그 공책을 계기로 학생들은 성민에게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봉사활동 후에도 꾸준히 편지를 보내온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다들 성민을 진심으로 위해주고 싶어 했다. 물론 성민은 살갑게 받아주지 않았지만.


꽃 피우는 방법을 몰라서 동동거리다,

여차하면 벌레에게 갉아 먹힐지 모르는,

위태로운 어린 꽃나무.


아녜스 수녀는 성민을 꽃나무에 비유했다. 꽃나무의 질풍노도가 어서 끝나주기만을 간절히 기도드렸다. 성민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은 곳곳에 늘 있었지만, 성민은 그걸 몰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근깨가 박힌 최성민 차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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