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학생들이 온 지 이제 하루가 지났지만, 성민은 어제를 두고 꽤 긴 하루라 생각했다. 병원일을 맡은 이번 여학생들은 제법 피곤한 성향의 집합체였다. 수학여행이라도 왔다고 생각하는지, 하루종일 부지런히 움직이고도 저녁 늦게까지 수다떨기 바빴다.
방명록은 가기 전날 쓰는 거였다며? 몰랐네. 빨리 친해지고 싶었어, 너랑.
어? 난 우리가 친구가 됐으면 해서 말을 놓은건데. 안 돼?
우리 친구하자! 반가워!
게다가 최성민이라는 주근깨 난 여학생은 성민에게 이런식이었다.
자꾸만 말을 붙이며 함부로 친구를 운운하다니.
이제껏 이런식으로 성민의 영역을 침범해온 사람은 없었다. 장대한 체격은 물론 카리스마 있는 얼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특유의 분위기까지 갖고 있던 성민인데. 여자 성민은 남자 성민의 이 모든 걸 단번에 깨부수었다.
날 언제 봤다고 친구하쟤?
대답 없는 성민의 혼잣말은 빈방의 공기를 훑고 사라졌다. 성민은 아침부터 아녜스 수녀를 찾아갔다.
집에 좀 다녀와도 돼요?
베드로 없으면 저 학생들 나 혼자서 어떡하라고. 너무하네. 베드로.
단박의 거절이었다.
신경쓰이는 여학생이 나타났구나?
수녀는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성민은 순간 최성민을 떠올렸으나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뒤돌아 휴게실로 향했다.
작은 키에 주근깨 박힌 얼굴. 발랄한 말투에 밉지 않은 몸짓. 낯선 이에게도 스스럼없는 붙임성이라니. 결론은. 대책없음.
어이구, 일찍 일어나서 회진 도시나봐요? 꼬마 의사님?
지나가던 닥터 최가 성민을 발견하고 말을 붙였다.
닥터 최는 서울의 유명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인데, 가끔 의료봉사를 하러 꽃동네에 들르곤 했다. 그래서 현재는 꽃동네 병원 담당의로도 속해있다. 오늘은 정기진료가 있는 날이었으므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사람은 성민뿐이 아니었다. 성민은 닥터최를 보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가 지나가고 나서야 뒤에 대고 볼멘소리를 했다.
꼬마 의사는 무슨.
그리고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꼬마 의사.
가끔 성민이 아침에 병실을 돌며 살피는 것을 두고 꽃동네 소속 의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성민은 유치하다는 듯 웃어넘기곤 했지만, 싫진 않았다. 단지 환자들에 대한 성민의 진심이었다. 이곳은 밤사이에도 운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꽤 있었으므로, 성민은 생(生)이 주는 감사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성민은 기도실로 들어가 정리하는 척을 하며 휴게실을 기웃거렸다. 집으로 도망을 못 가는 대신에 연두색 공책이라도 며칠간 치워둘 작정이었다. 이미 그녀들이 방명록을 썼다고는 했지만, 아마 속속들이 살펴보진 못했을 것 같았다. 공책을 빌미로 주근깨 소녀 최성민은 성민에게 치근덕거리며 달라붙을 게 뻔했다. 그저 공책이 그녀들의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몹시 신경이 쓰였다. 문을 두드리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내부는 조용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곤히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꺄르르르.
저 멀리 복도 끝 병실에서 여학생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성민의 귀를 때렸다. 이는 분명 휴게실 안에서 자고 있어야 할 여학생들의 웃음소리였다. 성민은 복도로 나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곳은 성민이 늘 요주의로 삼고 있던 병실이었다. 김상만과 양순자가 속해 있는 그 병실. 매 식사 시간마다 성민이 실랑이를 벌이는 바로 그 곳이었다.
성민은 어느새 병실 앞에 서 있었다. 머리를 빼꼼 내밀자, 제일 먼저 최성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그녀는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목뒤 끝에 닿도록 내려두었다. 솜씨가 꽤 좋은 탓인지 그녀의 머리모양이 꽤나 정갈했다. 성민의 눈에도 그 머리 모양은 매우 단정하고 예뻤다. 볼에 주근깨가 박힌 최성민이 환하게 미소 짓던 얼굴도 연이어 떠올랐다. 순간 가슴이 콩닥거렸다.
몇 살이야?
그녀들의 웃음이 멈추자, 양순자의 질문이 시작됐다.
별것 아닌 대화에도 그녀들은 밝게 웃어주고 있었다.
저희 다 열 여덟 살이에요, 할머니.
최성민의 살가운 대답이었다.
으응, 몇 살이라고?
열 여덟 살이요, 할머니.
으응, 그런데 몇 살이야?
열 여덟 살이요.
으응.
양순자는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몇 살이야? 너네들 다 몇 살이냐고? 내가 입 아프게 몇 번째 묻는 거야?
거듭되는 양순자의 질문에 여학생들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나 양순자가 무안해할 것을 배려해 크게 웃지는 않았다. 그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서로를 보며 눈짓으로 웃을 뿐이었다.
열 여덟 살이에요, 할머니!
끝까지 상냥하게 답해주는 이는 최성민 뿐이었다. 그 자리에 최성민 말고도 여학생이 셋은 더 있었으나, 그녀들은 최성민보다 반보 정도 뒤로 물러선 채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뭐 불편한 거 없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으응, 없어. 없어.
할머니.
응?
오래오래 사세요.
최성민의 돌발적인 언행에 함께 있던 여학생들도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성민도 그녀들의 머릿수를 헤다 말고 시선이 자동으로 최성민에게 향했다.
저희 할머니는 지난달에 하늘나라로 소풍가셨거든요. 할머니는 오래 사셨음 좋겠어요.
최성민의 진심이었다.
순간 병실 분위기는 숙연해지는 듯 했으나, 양순자의 다음 반응에 다들 실소가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이년아, 그러면 네가 나 먹여 살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