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06>거슬리는 남학생

by 랑애
할머니, 일단 오래 사세요. 그러면 그건 제가 그때 가서 결정할게요.


최성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너스레는 가히 대단했다.


뭐? 그럼 그래라! 푸하하!


또래답지 않은 능청에 양순자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에서 지켜보며 서 있던 여학생들도 최성민의 넉살에 못 당하겠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실 문 밖에서 지켜보던 성민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침대 좀 올려줘. 여기 밑에 돌리면 돼.


네, 잠깐만요.


양순자의 부탁에 최성민은 얼른 침대 아래로 몸을 숙이며 천천히 침대를 일으켰다. 이제 그녀는 곧 밥을 달라고 재촉할 게 분명했다. 평소 양순자의 대사는 거의 정해져 있었고, 그중 80%는 음식에 관한 집착이었다.


빨랑 밥 줘!


성민의 예상대로 양순자는 침대의 절반이 올라가자마자 보조 식탁을 펼치고 밥을 달라며 소리쳤다. 이에 최성민은 잠시 당황하는 눈치었으나, 곧 반달눈이 되어 양순자를 달랬다.


배고프세요? 아침 식사 준비 됐나 제가 보고 올까요?


상냥하면서도 나긋한 구석이 있는 여자 성민이었다.

남자 성민은 그녀의 이런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괜히 병실 안으로 들어가 선반 위의 음료수병을 치우는 척 하며 최성민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언뜻 보이는 최성민의 옆얼굴은 꽤 귀여운 이목구비였다. 가지런히 땋아 내린 뒷머리와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착한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성민은 원래 피부가 하얗고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했기에, 지금 그녀가 예뻐보이는 것은 오로지 잘 땋아 내린 머리 손질 실력 덕분이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런데 학생. 예쁘게도 생겼네. 몇 살이야?


양순자는 또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성민이 음료수병을 치우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은 양순자 역시 여자 성민에게 푹 빠진 모양이었다.


열 여덟 살이에요, 할머니.


지치지도 않고 답해주는 최성민이 가히 대단해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반달눈을 하고는 보드랍게 굴었다.


으응. 이제 알겠어. 열 여덟 살. 내가 우리 할아버지한테 시집갔던 나이네. 참 곱기도 하지.

양순자는 어느새 밥에 대한 의욕을 까맣게 잊은 채 최성민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건 아니건 자신을 향한 따스함은 잘 알아채는 것 같았다.


있잖아, 학생... 고마워.


처음으로 보드랍게 구는 양순자의 인사였다.

성민은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성민마저도 처음 보는 양순자의 살가움이었다. 과거 성민도 같은 질문을 받았지만 짜증이 솟구친 나머지 결국에는,

나? 양 여사랑 같아.


라고 답을 하고서야 질문이 종결되었었다.

성민은 복도 정수기 앞에 서서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자꾸만 양순자와 최성민의 상황이 눈에 밟혔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행동을 한다던데. 혹 양순자의 경우가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최성민에게 묘한 마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성민도 지난밤 그녀의 친절에 생소한 감정을 겪었듯이, 양순자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주근깨가 가득해 웃을 때마다 볼 위로 도드라지는 최성민은 예쁜 기준에 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미(美)의 기준을 타협하고 싶진 않았다.




성민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곧장 지하 식당으로 내려갔다.

주방에는 남학생들이 일찌감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식판에 음식을 담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성민이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그때 바깥으로 통하는 주방의 뒷문이 열렸다. 스포츠머리를 한 남학생이 부랴부랴 들어왔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머리가 긴 여학생이 황급히 사라지는 것도 성민의 눈에 들어왔다. 남학생은 성민을 보자마자 눈부터 흘겼다. 그러더니 들통을 꺼내들고 씻으러 개수대로 갔다. 주방 뒤편에서 여학생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필 성민이 들이닥친 시점에 들어왔다는 타이밍은 공교로웠다. 마치 노닥거리다 들킨 것도 같았다. 성민은 어차피 관심 밖의 그들이었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스포츠머리의 남학생은 들통을 씻으면서도 눈으로는 성민을 빗뜨고 쳐다봤다. 근육질에 체격이 좋은 남학생이었으나, 성민도 학교 다닐 때는 주먹으로 한가닥 했으므로 두려울 것은 없었다.


다만 지금의 시간과 공간이 남학생에게나 성민에게나 싸움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남학생도 그걸 잘 알았기에 눈이 튀어나오도록 성민을 노려보면서도 먼저 시비를 건다거나 들통을 던져버린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거친 눈빛은 성민을 영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성민은 애써 이를 무시하려고, 조용히 식판의 개수를 확인하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만약 또다시 사고를 친다면 이번에는 단순한 사회봉사로 끝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그의 불쾌한 시선을 꾸역꾸역 눌러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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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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