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저 기억 나세요?
예전에, 여자랑 같이 가다가 어느 날 혼자 갔더니,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하셨거든요.
못 알아보시죠. 그러게요,
그때는,
제가,
지금이랑 조금 달랐나 봐요.
오랜만이라고요. 그러게요,
지금은,
먼 길을 돌아 여기에 왔습니다.
꽤나 많은 걸 했다고 생각했는데,
허송세월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을 삼키며 웃는 내게 사장은 말했다.
- 그 미소가 기억납니다. 그 미소가, 겨울다웠어요.
디어클라우드, 얼음요새
먼 길을 돌아 여기에 왔다. 여기에 온 걸까, 여기까지 온 걸까, 혹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걸까. 끝나지 않는 질문들, 굶주린 시간이 잡아먹듯 앗아간 시절과 작은 시련에도 헐떡거리던 나의 모습은 모두 그대로인 걸까? 나는 무엇을 극복하려 몸부림쳤으며 그 무엇에 흔들렸던 걸까.
과거와 현재를 주시하는 시(詩)들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시들을 구명하는 것이 비평가의 존재 의미이며, 가냘픈 소망을 얽어 무언가 되고자 하는 것이 청춘이다. 부산 출신 비평가 K교수가 막걸리를 따라주며 던진 말은 난해시에 대한 나의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어서가 아니라, 창작자를 상처입히는 그 자신 삶을 위한 올바른 변명이라 기억에 남았다.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한 번쯤은 찬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을 곧바로 보려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눈빛이 형형한 사람보다 좋아하고, 둘 다를 가진 사람보다 둘 중 하나만 가진 사람을 더 인간답다고 느낀다. K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범주를 만족하는 예시다.
금과옥조, 속옷처럼 지닌 문장들이 있었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 꿈이 어디쯤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니 계속 간다. 나는 결코, 결단코 단호히, 포기하지 않는다. 길은, 끝나지 않는다. K교수를 만나고 기분이 이상해 생맥주를 혼자 6잔 마셔버렸다. 시한부의 삶도 가끔은 평범하게 과도해야 한다.
눈에 밟히는 여자가 있다. 나이도 나보다 많고 그다지 다정하지 않아서 신경쓰지 않았는데, 자려고 불을 끄면 꼭 생각이 났다. 어쩌다 말이라도 섞게 되면 그 기억이 또렷했고, 어느 날 무척 꾸미고 온 모습에는 샘이 났다. 첫눈이 오던 날 그녀를 찾아가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연구실 앞을 서성거렸다. 이게 특히 혼란스러웠다.
그 여자는 물론 내게 하등의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다른 많은 여자들에게 그랬듯 나는 이번에도 홀로 물러설 것이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모르겠다. 한 번쯤은 무턱대고 들이대 봐야 한다는데, 난 상처 어린 자존심으로 아무에게도 그러질 못했다. 설아에게, 또한 아무개에게.
섬망이 심해져 설아 외에 누굴 만났던 걸 올바로 기억하는 게 힘들다. 혹 내가 만난 모든 여자가 다 설아는 아니었을까 싶은 어설픈 상상이 될 때도 있다. 어쩌다 보니 아직껏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증세를 밝혀야겠단 생각이 든다. 이전에 쓴 글들을 읽으면 되지만, 그러지 않는다. 한 번 마친 글들은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스물여섯까지 왔다.
지나온 길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눈이 녹고 봄이 오면서 사라진 발자국들을 찾고 있다. 회한을 거머쥐고 내처 걸어온 길.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그 길의 끝에서 산사나무 가지를 꺾어 뒷사람들에게는 고개나 한 번 끄덕여주고, 돌아오는 길 멀리서 인사하는 너에게 다가가 건네줄 수 있기를 상상했다. 너의 포옹을 받고, 너와 입을 맞추며, 네가 있어서 길의 끝까지 가볼 수 있었다고, 고맙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설아야, 그걸 네가 알고 있었다는 걸 나도 안다.
지나치는 모습 속에 너를 찾아 헤맸지
자화상, 나의 고백
세상에 던져진 필설 가운데 아늑한 것들을 얽어 스웨터를 지어 입고 나는 꿈을 꾸는 청춘으로 가을밤을 지새워 너에게 닿는 단 하나의 길을 모색했다. 다 마치기 전에 첫눈이 내려 갑자기 갈랫길을 마주한 나는 사슴처럼 놀란 눈으로 너의 많은 부탁, 당부, 고백, 눈물을 줍기 시작한다. 이미 허리는 한참을 굽어 나는 물구나무를 서고 세상을 본다. 그 속에 흩어놓은 발자국을 따라 헤맨다. 뒤돌아보면 길은 여기로 오는 수백 갈래 골짜기였고, 눈앞에 펼쳐진 길은 다시 수만 수십만의 오솔길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길이 하나뿐이라 그 길의 처음이든 끝이든 네가 없다는 것만이 분명해진다. 분명함이 아파 나는 헤맨다. 헤매다 보니 추억을 마주친다.
추억처럼 한때는 내가 먼저 카페 브레송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