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자정 전후로 눈이 되어 내렸다. 첫눈의 첫 송이가 별똥별처럼 가로등을 지나쳤다. 눈비는 왔다갔다하다가 곧 완전히 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눈은 새벽 내내 적요로이 내렸다. 한강의 말처럼-그 또한 언젠가 들은 바를 옮긴 것인데-서로 다른 결정(結晶)들이 결속하며 생긴 빈 공간이 소음을 잡아먹었다. 눈의 결정은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다고 한다. 인간처럼 그들은 각자 유일하되 모두 유한하다. 머리맡의 등잔을 켜고 눈 쌓이는 소리를 듣다 잠들었다. 일어나서 보니 나뭇가지가 습설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창을 열어둔 채로 잤더니 입술이 잔뜩 부르텄다.
아침 햇살은 고요했다. 새벽을 건너온 눈은 힘있게 내렸다. 눈은 묘연했고 애처로웠으며 입시울을 당겼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문득 쏟아지는 눈들의 소리는 박수갈채 같았다. 곁에 아무도 없는 나를 위한 바람의 박수. 그건, 언젠가 한없이 바랐던 누군가의 인정이리라. 나는 동정하는 법을 잊어버리기 위해 통곡의 사고 회로를 지웠다. 흐느낌을 멈추지 마라, 강물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얘기했던가. 글쎄, 내 마음은 겨울 강물이로되 눈은 녹지 않고 흐느낌은 이미 그쳤다.
윤종신, 모처럼
눈은 온종일 올 듯했다. 붉은 잎사귀는 얼어붙은 잠자리처럼 마디가 시퍼랬다. 중앙도서관으로 가는 길 양옆의 상록수 군락은 수십 마리 강아지들이 달리는 것처럼 눈이 덮였다. 입김이 비져나왔다. 새삼스런 추위에 모두가 한숨을 쉬었지만 눈 덕분에 거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이해를 돕기 위해 밝히건대 난 아직 학교에 다닌다. 요새는 비록 시한부의 삶이라도 기존의 일을 묵묵히 하다 가는 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서울에 있으면 통원치료를 받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어차피 내 병은 딱히 치료가 도움이 되는 종류가 아니다. 만일 어딘가 떠나더라도 확실히 마음먹고 후회없이 가는 게 좋다. 내가 죽는 날 마지막으로 떠올릴 것 같은 사람과의 추억이 있는 곳에 준비하려 한다. 갈 준비, 떠날 준비, 잃어버릴 준비를, 결연하게.
필설만은 언제나 계속됐다. 나의 폐허에 서슴없이 손을 올렸고, 불행에 가을옷을 입혔고, 꿈을 짓누르는 밀실의 정가운데로 약진하며 숱한 결심을 이뤄냈다. 그렇게 무턱대고 전진하던 문장들이다. 내가 말하고 쓴 많은 이야기는 요컨대 흔적이며, 파편이며, 그것들이 모인 전부다.
요새는 매조지가 잘 안 된다. 확신이 줄어들었다.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 이만한 거짓말은 또 어디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 엄동설한, 뼈시린 밤에도 장갑 없이 내놓던 손들이 그립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첫눈이 왔다는 건 내가 혼자라는 오랜 사실이 끝날 수 없다는 예지가 아닐까. 난 이런 쓰잘데없는 방식으로 고독을 다루고 있다.
또다시 사랑으로 간다. 노력하지 않고서 누군가 내게 와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한심한 나태가 어디 있겠냐만, 도리가 없다, 나는. 나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있잖는가. 이마저 변명일까?
그래도 눈이 와서 좋다.
하림, 난치병
언젠가 설아가 건넨 말이 있다. 그날도 오늘처럼 첫눈이 내렸다. 설아와 나는 꼭 잡은 손을 내 학과 점퍼 주머니에 넣고서 단골 분식집으로 향했다. 설아가 입은 감색 코트에 눈송이가 빨려들었다. 설아는 반대쪽 팔로 내게 팔짱을 꼈다. 우린 고작 분식집에 가는 주제에 마치 밥 딜런의 앨범 표지에 나오는 남녀처럼 진하게 걸어간 것이다.
그곳에서,의자 높이 위로 트인 창밖을 바라보던 설아는 문득 순천만에 가자고 했다. 전국에 눈 예보가 나는 날, 순천만에 가자고. 왜 순천만이었는지는 모른다. 그곳이 남쪽을 대표할 법한 곳이어서 그런 건가? 삽시도에 살면서 갯벌이라면 숱하게 보았을 충청도 여자에게 순천만이 가질 특별한 의미는 뭘까? 그때는 당연히 몰랐고, 아직도 모르겠다.
- 전국에 눈 예보가 나는 날, 순천만에 가자. 거기서 네가 만든 노래를 불러줘.
겹문장 두 개로 이어진 네 개의 홑문장. 이중에 내 마음을 움직인 건 순천만에 가자는 게 아니다. 전국에 눈 예보가 나는 날이라는 문장이, 특히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과연 전국적인 눈 예보란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고, 만일 없다면 설아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건 것인지도 고민됐다. 그러다 문득-제대를 얼마 앞둔 올해 여름-전국에 확신의 눈 예보가 나는 곳에 가면 되지,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면 말이다.
삿포로에 가겠다는 혼자만의 약속을 물론 설아에게는 전해주지 못했다. 그러려던 게 아닌데, 그리 되었다. 제대하는 날까지 내가 기대한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대 전후로 일어난 약간의 일은 까마득한 옛날처럼 어렴풋하다. 첫눈은 텅 빈 장롱 속에 놓아둔 초 같다. 저 깊이 박아둔 추억들이 울렁거린다.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 촛농이 흐르면 나는 얼어붙은 낙엽을 생각한다. 결국 낙엽은 촛농처럼 굳고, 결국하여 가을은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