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atermelon
Nov 10. 2024
담에 머무른 첫날,
한 이방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현재 함께 점유하고 있는 이 공간,
호텔 로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고서야 자기소개를 했고,
내가 이제 체크인을 해야 한다고 하자
Sure, I will see you around라며
자기 갈길을 갔다.
다음날 아침을 먹으면서 우린 눈이 마주쳤고
그는 커피를 마시러 나갈 거라며,
넌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을 작정이냐며 놀렸다.
그렇게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또 마주쳤을 때
전날 경복궁 공터에서 기타를 치는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브이로그를 보여줬고
저녁에 좋은 재즈바를 찾았다며,
너도 여기 머무르면서 기회가 되면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며칠간 마주치다가
우린 별일 아닌 듯 캐주얼하게 저녁을 먹었고
난 그에게 갈매기살을 구워주며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누었다.
너 삼겹살 목살은 먹어봤다며,
근데 한국왔으면 갈매기살이 찐이야 라며,
그러고 나니, 내가 지금까지 스몰토크 하는 법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 모르는 두 남녀가, 말을 걸 땐,
적어도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는 그 대화가 '번따'로 제한되어 있었다.
남녀사이 뿐만 이 아니다.
서로 잘 모르면서도 이 침묵을 깨보겠다는 이유로 남친, 여친있냐는 아주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언제 결혼하니, 아이는 가지지 않을 거니, 심지어 왜 둘쨰는 생각 없니 물어보는 어른들에 질리기도 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은 차단했고,
특히나 나보다 나이 많은 이성의 접근을 경계했다.
상대방이 아무리 친절하고 젠틀해 보여도,
그 속내를 알 수 없고, 아무런 이유 없이 목적 없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그 안에는 creepy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반면, 이 덴마크에서 온 이방인 Ervin은 스몰토크의 대가었다.
서로의 거리를, 서로의 privacy를 존중하면서도
가까워지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각자의 개인적인 삶을 노출시키지 않고도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알았다.
어떠한 사람을 만났고, 지금 연애 중인지 이야기하지 않고도
연애관이 무엇이고, 어떤 결의 파트너와 함께 하고 싶은지 이야기했고
내 연봉이, 회사에서의 내 직급이, 내 사회적 위치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도
내가 왜 내 일을 좋아하고, 어떠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어 하고, 어떠한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지 읽어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앞에서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꼈다.
물론, 그 사람도 나에 대한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나에게 접근했을 수 있다.
아마 높은 가능성으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그의 속내는 그렇게 creepy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관심 있다고 말해도
만약 내가 그런 식으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
내가 자리를 뜨게 둘 것 같았다.
아니 자연스럽게 웃으며 다음 대화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노골적으로
급작스럽게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intimacy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냈기에
그는 더 매력적이었다.
더 자신감 있어 보였고,
주변에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이 느껴졌다.
우린 그날,
재즈 음악이 흐르는 한적한 바에서
손을 잡고 왈츠를 췄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거의 키스를 할 뻔했지만,
자신은 나와 키스를 하고 싶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그의 앞에서 내가 멈칫거렸기에, 짧은 침묵 뒤에 자연스럽게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우린 결국 키스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하지 못한 키스가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