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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 (17)] 말할 수 없는 비밀, 고해성사

by 고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Au nom du Père et du Fils et du Saint Esprit. Amen)"
"네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Je vous écoute)"


프랑스에서의 고해성사는 우리나라와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바로 대부분의 성당에서 칸막이 없이 얼굴을 직접 마주 보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환경이다.

우리나라도 몇몇 성당이나 피정의 집에서 신부님의 재량에 따라 칸막이 없이 얼굴을 보며 고해성사를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성당은 칸막이가 있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게 되어있다. 나 또한 어린 시절에 성당을 다니면서 칸막이가 있는 고해성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사제가 되어 사목하고 있는 나였기에 이러한 차이점에 익숙해져야 했다. 본당의 고해성사 시간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미리 성당에 들어가 환복을 하고 침묵 속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해성사 때 쓰이는 영대(사제복 중 목과 어깨에 걸치는 띠)의 색은 참회를 나타내는 보라색이다. 보라색 띠를 바라보며 오늘 맞이할 신자분들이 하느님의 따뜻한 용서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사실 토요일 오전마다 성당은 열려있지만, 매주 신자들이 많이 오시지는 않는다. 많아봐야 10명 이내로 오시고, 평균적으로는 서너 분 정도 오신다. 몇 명이 오시는지 명 수는 중요하지 않기에 나는 한 분이라도 마음의 위로와 따뜻한 하느님의 용서를 맛보시고 돌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처음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한 날에는 네 분의 신자분들이 오셨다. 얼굴을 직접 맞대고 이야기해야 해서 긴장되었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어렵지 않았다. 나는 신자분들이 들어오시면, 우선 이곳까지 발걸음 하신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아주 기특하게 눈여겨보실 것이라고 말했다. 준비한 멘트가 아닌, 그 자리에서 그 신자분을 보며 생각나는 멘트였다. 그렇게 신자분들을 대할 때마다 느껴지는 게 다르고 멘트가 달라졌다. 사제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 중 하나는 '반드시 고해성사의 내용을 고해성사 밖에서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법이다. 다행히 나는 잊어버리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이 부분에서는 걱정할 부분이 없었다.


고해성사라는 소중한 하느님의 일을 집전하면서 크고 작은 죄들을 귀로 들었다. 우리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들... 사람들 사이에서 짓고, 내 생각 안에서 짓고, 하느님을 대하며 짓는 수많은 죄들을 들으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죄와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과 동시에 죄와 가까운 만큼, 하느님의 용서도 참 많이 맛보며 살아간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의 손길. 이 수많은 손길 중 하나가 우리가 용기 내어 참석할 수 있는 고해성사가 아닐까...


나는 또 고해성사가 주는 인간적인 어려움을 안다. 죄를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내 죄를 안다'는 것에 상당한 불편감을 느끼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걱정 마시라'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성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용기가 이 불편감을 이기길 신자분들에게 바랄 뿐이다. 나도 해 본 생각이고 실제로 불편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성당에 나가고 고해성사를 보는 용기가 나에게 더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꾸준히 성당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의 부족함을 용서로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인 고해성사.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는 용기를 가진 모든 신자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confession-01-1024x683.jpg 프랑스 본당에서의 고해성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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