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17)] 파리에서 공부하다

파리의 코로나 바이러스

by 고미사

2019년 4월,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랑스에 온 지 1년이 된 시점에 난 사건이었다.


그해 7월, 내가 진학할 대학원을 정했다. 바로 파리 6구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이다. 입학 등록 서류제출을 하고, 9월부터 신학과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총 3년 동안 이어지는 과정인데 첫 1년은 석사준비과정으로써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면서 신학과 수업을 병행하는 기간이었다. 언어 수준을 많이 올혀야 했기에 매일 언어 공부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신학용어를 프랑스어로 익히는 작업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 어려웠지만, 나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이듬해 2020년 1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단어를 뉴스를 통해 처음 들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에 퍼지고 있다는 뉴스를 매일 밤 보았다. 함께 기숙사에서 지내던 친구들은 "너희 나라 바이러스 퍼져서 안타깝다..." 라며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단지 2주가 지났을 무렵,

코로나가 유럽대륙에 상륙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부터 코로나의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프랑스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통령 담화와 함께 긴급 봉쇄령을 내렸다. 모든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집에서 온라인으로 들어야 했고, 장보기 위해 집을 나서려면, 매번 나라에서 인준한 외출 확인서를 인쇄하고 서명하여 지니고 다녀야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코로나 기간 중에 느껴진 파리의 한산함을 잊지 못한다. 큰 대로에도 아무도 없고, 마스크를 쓴 경찰들은 말을 타고 조용히 순찰을 돌뿐이었다. 다행히 내가 지내던 대학원의 기숙사는 작은 정원이 있어서 매일 조금씩 산책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배구, 탁구를 하며 한적한 분위기를 달랠 수 있었다.


내 기숙사는 정원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지 학교 너머 다닥다닥 붙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분들은 어떻게 지내실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봉쇄령은 이렇게 약 세 달간 이어졌다. 나도 다른 학생들처럼 수업을 온라인으로 듣고, 쓰기와 읽기 시험은 영상으로 교수님과 치렀다.


2020년의 겨울과 봄은 이렇게 코로나 봉쇄령과 함께 지나갔고, 여름에 되어 나의 석사과정 여부를 결정할 시기가 되었다. 나는 담당교수님께로부터 나의 종합성적으로는 석사과정 2년 차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1년간 언어 수업을 병행하면서 2년 차 석사과정을 진행할 수는 있겠지만, 비용이 좀 더 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나는 수도원에서 파견된 학생이었기에 금전적인 부분을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소식을 수도원에 전달하고, 내가 받은 답은 파리에서의 진학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나의 미래는 순간 불투명해졌다. 고등학교 때 1년이 늦어지면 엄청 늦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공포스러웠는데 지금은 2년이 늦어질지 3년이 늦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서운 마음을 며칠간 안고 지냈다. '왜 이렇게까지 두려운 걸까?'라고 혼자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지던 찰나, 순간 모든 것은 내려놓은 듯 마음이 평안해졌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관대한 마음 같은 무언가였다. 갑자기 찾아온 이 평안함과 함께 프랑스에서 계속 지내는 것이 내 욕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재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결과는 하느님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맡겨야겠다'.라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우리 수도원이 소속된 성당의 관할 신학교인 낭트(Nantes) 신학교에 연락을 했다. 여름방학 동안이라 이메일로 연락을 드렸는데, 기적적 이게도 답장이 왔다. '환영한다'는 희망적인 답장이었다. 개인적으로 코로나라는 안타까운 시절에 느낀 한줄기 희망이 담긴 소식이었다.


나의 프랑스살이는 기적적으로 계속될 수 있었으며, 그 장소는 파리에서 낭트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프랑스에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반복해서 되뇌며, 낭트에서의 신학교 생활 준비를 시작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