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민혁이 책장을 둘러보고 있다. 핸섬보다는 터프에 가까운 외모. 수능을 앞둔 고3 학생이다. 내가 카페 카뮈에 오기 훨씬 전부터 단골이라고 한다. 손님이라기보다는 응석받이 막내처럼 보인다. 도윤을 형이라 부르고, 공부하고 있는 수연의 등에 대고 ‘누나도 안녕’이라며 친한 척하고. 들어오자마자 4인용 테이블 의자 한쪽에 가방을 내던지고 책장을 두루 살핀다. 자기가 무슨 사서인양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정돈하고는 그중에 하나를 뽑아 자리에 앉는다. 나에게는 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 녀석한테 서열로 따지자면 나는 맨 끝이다. 책이 가장 우선이고 다음은 도윤, 수연의 순서다. 할아버지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내 순위가 바뀌지는 않는다. 최상위 서열이니까. 왠지 모를 질투와 경쟁심을 불러오는 녀석이다.
“형, 이 책 구비했네. 그러지 않아도 부탁하려고 했는데.” 이 녀석은 이런 식이다. 책을 살 것도 아니면서 새로 들인 책만 보면 달려든다. 책을 파는 서점도 아닌데. 거기다가 없는 책을 구비해 달라고 요청까지 한다. 누가 보면 개인 도서관인 줄 알겠다.
“내가 네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 틈 나면 읽어. 너.. 고.. 아니다.” 도윤이 말을 주워 담는다, 그럴 거면 민혁이가 원하는 책을 가져다 놓지나 말지. 정말이지 도윤의 머릿속에 들어가고 싶다.
“이 책 오늘 내가 빌려가도 돼?”
“새삼스럽게 왜 그래?”
“오늘 들어온 책인데 날름 빌려가니까 미안해서 그러지.” 눈치는 없어도 염치는 있는지 미안한 줄은 아네. 언제 한 번 녀석한테 눈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어야겠다. 눈치 하면 또 난데. 책 보다 내가 나을 것이다.
“엄마한테 들키지나 마라.” 어라.. 혹시 책이 19금. 야릇한 둘의 미소.
“걱정 마. 곱게 잘 돌려놓을게”
“책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그래.” 도윤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말 그런 거라면 둘 모두에게 실망인데. 민망한 장면을 볼성싶어 민혁이 나갈 때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다음 날. 올 게 왔다. 도윤이 걱정하던 그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민망한 장면을 본다 해도 민혁의 눈을 통해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이미 늦었다. 후회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른 저녁 시간이었다.
민혁이 엄마가 들이닥쳤다. 곧 수능을 볼 아이한테 소설책을 빌려 주었다는 이유로 한바탕 소란을 피운 것이다. 카페에 손님이라고는 수연뿐이었다. 수연을 손님으로 본다면 말이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그날의 첫 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그마저도 차 한잔 마시지도 않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폭포수처럼 퍼붓기만 했다. 도윤이가 되뇐 죄송하다는 말의 횟수만큼이나 그녀는 “우리 민혁이는 의대를 가야 해요.”라는 협박인지 통보인지 모를 말만 반복했다.
도윤은 배알도 없는 듯 민혁의 엄마가 나가는데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사과의 마음이니 꼭 받아 달라고, 그리고 꼭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를 했다. 그 책은 헤르만헤세가 지은 <수레바퀴 아래서>였다.
살의까지는 아니지만 경멸이 담긴 눈길로 그녀의 눈 속을 헤집어 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다. 도윤과 수연이가 민혁의 공부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흔들리는 민혁이가 유일하게 의지한 사람이 도윤과 수연이었다는 것을.
이 손님은 며칠 후 다시 한번 카페 카뮈를 찾아올 것이다.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손님이 나간 후 허탈한 정적이 가라앉자 도윤은 자몽에이드를 만들었다. 수연과 함께 마셨다. 나에게는 서랍 속 깊숙이 숨겨 두었던 츄르를 꺼내 주었다. 스트레스는 먹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는 듯이.
우리는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톡 쏘는 탄산과 훅 올라오는 츄르의 향이 무겁고 탁한 카페의 공기를 정화해 주었다.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그것도 잠시다. 도윤은 민혁을, 수연은 자기 자신을, 나는 기특하게도 카페 카뮈를 걱정한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나는 걱정이 없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나도 내 미래를 알 수 없다. 중이 제 머리를 깍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냐고 묻고 싶겠지. 나는 내 눈을 볼 수 없다. 거울을 보면 될 거 아니냐고 과학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조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내가 아니다. 아마 신도 거울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신이 될 수 없다. 미래를 안다고 해도 인간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무게가 조금 줄어들 뿐이다. 그것조차도 질량보존의 법칙을 따른다. 불가능하겠지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걱정을 하지 않으면 그 무게는 0이다.
그것을 아는 나도 걱정을 한다. 그러니 안다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착각도 하지 마라.
이야기가 또 엉뚱하게 무거워졌다. 여전히 초보 고양이 티를 낸다. 카페 카뮈에 대한 기특한 내 걱정을 말하려다가 이렇게 되었네. 내 걱정은 겨울을 나는 것이다. 카페가 굴러가는 모습을 보면 겨울은 둘째치고 당장 가을도 못 날 것 같다. 그래 겉으로는 손님 없는 카페를 걱정하면서 속으로는 줄어드는 내 간식 타령인 거 인정한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몽에이드를 몇 모금 마신 둘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하다. 스트레스의 앙금을 풀고 가야 한다는 듯이 수연이 묻는다.
“우리보다 자기 자식인 민혁에 대해서 더 모른다고 한마디 하려다 참았어.”
“잘했어. 그런데 우리가 엄마보다 더 많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 다만, 관점이 다른 게 아닐까 싶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민혁이가 가고 있는 길을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공감하고 이해하기가 쉬었을 거야. 하지만 민혁이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의 세상을 보는 눈으로 민혁이를 보고자 하는 게 아닐까.” 도윤은 그렇게 당하고도 민혁이 엄마를 두둔한다. 부처야 뭐야. 도대체 이 인간의 과거 속에는 어떤 드라마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간식 뒤에 가려진 도윤에 대한 호기심이 고개를 내민다.
“오빠는 다 좋은데 그게 문제야. 다 좋게만 보려는 거. 시점을 달리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말이야. 그렇게 이해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말 한마디 못하고. 거기다가 헤세의 책은 왜 드린 거야.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은데.”
“내가 그런 면이 조금 있지. 어린 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한다고 해도 반감만 살 뿐이야. 헤르만헤세의 한 마디가 더 크게 가 닿을 거야. 그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읽고도 느끼는 게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람들은 이상하다. 같은 말이라도 유명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 말하면 그게 더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착각한다. 도윤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나도 읽어 봤지만 우리 또래가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더 어릴 때 읽어야 하나?”
“물론 우리 또래가 읽어도 좋겠지만 내 생각에는 부모들의 필독서가 아닐까 싶어. 내가 원하는 자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게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테고. 책에 따라오는 동사는 ‘읽는다’보다 ‘공감한다’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내가 졌다. 책장에 책들이 장식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됐네.”
“그거 칭찬이지?”
“칭찬 아니거든. 그건 그렇고, 저 많은 책들 중에 카페 운영하는 노하우는 없어?”
“그건 왜. 카페 차리게?”
“어휴.. 감각이 없으니.. 손님도 없지.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었잖아. 민혁이 한테는 개인 도서관이고 나한테는 정말 럭셔리한 공부방이지. 손님이 있어야 눈치를 덜 볼 거 아니냐고.”
그래 수연아 말 잘했다.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에이드를 먹은 것은 너희들인데 내가 속이 시원하다. 츄르 좀 먹어 볼래. 세상이 달라 보일 수 있어.
“하긴 나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 할아버지를 볼 때면 걱정이 되고 텅 빈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데 하며 고민도 해보지만 그때뿐이야.”
“이제는 식구도 하나 늘었잖아. 오빠한테 책임감이 없을 리는 만무하고.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민혁이랑 나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해 볼게.” 식구라면 나를 말하는 거겠지? 수연이 자신을 말하는 건 아닐 거야. 그렇지.
“고마워. 뭐부터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식구’와 ‘책임감’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힌 듯 도윤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고통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나는 기분이 좋다. 나한테도 식구가 생겼어.
도윤에게 자몽에이드의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달콤 쌉싸름’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