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카뮈 7 - 능력의 대가

by HeartStory

오늘 아침, 내 털에 달빛이 남아 있었다. 밤새 비가 내린 탓인지 공기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비 냄새 속에는 오래된 기억들이 숨어 있다. 그 냄새를 맡으면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처음 도윤을 만났던 날, 그리고 내가 '보게 된 것'들이 시작된 그날의 냄새가.


도윤은 카운터 뒤에서 커피머신을 닦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훑었다. 오늘도, 그들의 눈 속엔 수많은 조각들이 떠다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이미 지나가 버린 일, 그리고 누구도 말하지 못한 일들이.

그것들을 본다는 건, 축복이면서 저주다. 가끔은 누군가의 눈 속에서 한 장면이 필름처럼 재생된다. 누군가의 고백, 울음, 포기, 혹은 아직 웃음 짓지 못한 행복. 그럴 때면 나는 꼭, 자기 집 창문 틈으로 남의 불 꺼진 방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된다. 보고 싶지 않은데 보이는, 보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장면들.


첫 번째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풍경이 짧은 파장을 일으켰다.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묵직하게. "딸랑..." 그 소리는 늘 어딘가로 나를 불러내는 주문 같다.

그는 낯이 익었다. 한 문장 상담 이벤트를 시작하던 첫날 카페 앞을 서성이던 남자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도윤이 물었다. 도윤에게는 이 멘트가 주문이다. 손님에게 주문을 받기 위한 주문. 음료 말고 다른 걸 요구해도 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그냥… 커피 한 잔만 주세요. 아무거나." 한국 사람들은 메뉴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거나’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그렇다고 아무거나를 주면 안 된다.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 데서 분명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오늘 이 손님의 ‘아무거나’에서는 허무함이 느껴진다. 만사가 귀찮기도 하고. 모든 것들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듯.

도윤은 카페 모카를 권한다. 내가 살짝 귀띔을 해준다.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가 좋을 것 같다고. 내가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는 것.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희미하게 깜박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좁은 병실, 산소호흡기, 창가에 놓인 작은 분홍색 인형. 그 옆에 앉은 그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인형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아이의 것이었다. 그는 손끝으로 인형의 귀를 매만지며 숨죽여 말했다. "내가 아빠라서 미안하다."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이 흔들렸다. 아직 살아 있는 아이의 목소리처럼.

"괜찮아질 거예요." 그의 눈을 보고 말했다. 물론 소리 없이. 그는 소리 없는 말이 들린 듯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며

"방금 뭐라고 했어요?" 도윤에게 물었다.

도윤이 커피 찌꺼기를 정리하다 나를 바라봤다.

"아니요, 그냥… 고양이가 울었나 봐요." 도윤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의 웃음 속엔 묘한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도윤이 청소를 마치고 불을 끈 뒤에도 나는 바 테이블 위에서 꼬리를 감은 채 생각했다. 나는 왜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을까. 아니, 왜 보았을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가면 됐는데, 그날은 달랐다. 그의 눈 속에서 꺼져가는 불빛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너… 아침 그 손님에게 뭘 한 거야?" 도윤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달빛이 낮게 갈려 있어서 그랬을까. 도윤의 눈빛이 그윽했다.

"그 남자에게 말했지?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은 내 앞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미라. 그 손님에게서 좋지 않은 장면을 보았구나. 그렇지? "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너도 나한테 전염되어 눈빛을 읽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 손님이 다녀간 이후로 말수도 줄고 하루 종일 기운이 없어 보였어. 그 손님에게서 퍼지는 파장도 무거웠고.”

나는 천천히 그의 손등 위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사람의 눈 속에는, 그 사람이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이 담겨 있어."

"그래, 전에 네가 얘기했지. 너는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너에게는 선물이자 저주라고도 했어." 눈빛도 음성도 낮은 주파수다. 내 감정에 맞추려는 듯.

"응. 하지만 그건 선물이 아니야."

"그럼 뭐야?"

"대가가 있지."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대가?"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내가 누군가의 미래를 보고 말할 때마다, 내 기억 하나가 사라져."

"기억?"

"응. 사소한 것부터. 오늘은… 아침 햇살의 냄새가 기억나지 않아."

나는 코끝을 들이밀었지만,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난 뒤의 냄새, 젖은 흙의 냄새, 그 모든 게 하얗게 지워진 것처럼 사라졌다.


도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그럼… 왜 말했어?"

"그냥, 그 사람의 불빛이 너무 약했어."

"그래도 너 자신을 잃는 건데."

"사람들은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잃고도 살아가잖아. 난 다만, 그걸 자주 자각할 뿐이야. 너를 닮아 가나 봐. 너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말이야. 이건 칭찬이야."

도윤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조금 슬펐다.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너에게 내 과거와 미래를 보여달라고 하고 싶어. 너의 기억이 하나 지워진다고 해도.”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심지어 그림자조차 없었다.

“미안하지만 너에게는 아무것도 안 보여. 지난번에 했던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미안해.”

“아무것도?"

“응. 그래서 궁금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넌 왜 나한테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겠지? 정답은 아니라도.” 짧은 한숨이 그의 입가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 숨결 속에서 오래된 추위를 느꼈다.

“그래,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길을 하나 알려줄게. 너는 듣기만 하잖아. 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으면 좋겠어. 나한테만 하라는 얘기가 아니야. 할아버지한테 해도 좋고, 수연이한테 해도 좋을 거 같아. 아직 그게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글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싶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라든가, 네가 어젯밤 꾸었던 꿈 이야기라든가.. 그렇게 하다 보면 네가 놓아 버린 기억들이 살아날 수 있을 거야. 난 너를 보고 싶어. 과거를 알지 못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그것이 내 능력의 맹점이라는 비밀 아닌 비밀은 말하지 않았다. 내 기억이 하나씩 지워진다는 것의 숨은 뜻도.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밖에서는 가로등 불빛이 프러시안 블루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창가에 올라앉았다. 도윤은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이방인>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억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꼭 좋은 건 아니었다.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가, 조용히 스스로의 빈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내 능력의 대가라면… 그래도 괜찮아.'

나는 내일의 나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윤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아무것도 없는 눈 속에서 내가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무언가의 조각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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