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다. 이벤트는 끝났지만, 벽은 여전히 말이 많았다. 자석으로 고정된 종이들은 바람도 없이 가끔씩 미세하게 떨렸다. 문장들이 자기들끼리 순서를 정한 듯 돌아가며 한 번씩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도윤은 사다리를 가져와 위쪽부터 먼지를 털고 있었다. "가을이 오래 머물렀네." 그는 혼잣말을 했다.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정리하다가, 한 장에서 멈췄다.
'내가 본 것을 잊을 수 있을까요?'
같은 문장을 이미 여러 번 읽었을 텐데, 오늘은 표정이 달랐다. 눈썹 사이가 아주 얇게 주름졌다. 나는 창가에서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종이는 질문을 하면서도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로 빼둘까?" 수연이 물었다.
"아니. 그대로 두자."
"왜?"
"이건… 누군가한테 벽이 아니라 거울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도윤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거울에 비친 얼굴이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바 테이블로 건너가 앞발로 문장들을 세어 보았다.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오늘은 스물한 개의 날씨가 카페 벽에 걸려 있었다.
풍경은 요즘 들어 소리를 바꾸었다. 예전엔 '딸랑' 하고 가볍게 뛰어올랐다면, 요 며칠은 '또르르' 굴러내리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색 재킷 소매에 비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가볍게 젖은 천의 냄새. 그 냄새는 늘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뒤늦게 따라왔다.
"따뜻한 라테 한 잔 부탁드려요."
"네." 도윤이 잔을 데우면서 묻는다. "설탕은요?"
"아니요. 달게 마시면… 뭐랄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네요."
그녀는 창가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유리창의 물기를 긋더니, 한 줄을 남기고 멈췄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올라앉아 그녀의 눈을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소리가 먼저 왔다. 짧은 비명, 이어지는 정적. 그리고 멀리서 누군가가 크게 외친다. "누가… 경찰 좀…" 소리가 엉켜 사라졌다. 그 뒤로 늦게 오는 사이렌.
라테가 놓이자, 그녀는 종이를 집었다. 볼펜 끝이 종이에 닿을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적었다.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그녀는 종이를 구겨 다시 펼쳤다. 구겨진 자국 사이로 글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도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벽에 붙이셔도 되고, 그냥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둘 다 하고 싶지 않다면요?"
"그럼, 여기 두고 가셔도 됩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두면… 언젠가 누군가가 대신 답을 해줄까요?"
"그럴지도요." 도윤이 잔을 닦으며 웃었다.
"때로는, 아무도 답을 하지 않는 게 답이 될 때도 있어요."
할아버지가 그때 들어왔다. ‘한 문장 상담’이 시작된 이후로는 거의 매일 나오신다. 오늘은 풍경이 조금 더 낮게 울렸다. 그는 젖은 우산을 세워두고, 손님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꺼내기 쉽지 않은 말씀을 글로 남기셨나 보네요."
여자가 쓴 종이를 보던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자신이 도망친 자리보다, 도망치며 남긴 발자국을 더 오래 기억하더군요." 여자가 선문답 같은 말을 남겼다. 자신이 쓴 문장에 답을 하듯.
카페의 공기는 말의 무게에 가라앉았다. 대신 라테의 김이 천천히 올랐다. 김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유리창 바깥, 길 건너 신호등이 파랗게 바뀌었다가, 다시 빨갛게 돌아오는 방향.
여자가 떠난 자리엔 컵자국이 동그랗게 남았다. 수연이 행주로 가볍게 닦고 나서, 종이를 벽에 붙였다.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그 문장이 어느새 아까 도윤이 오래 들여다보던 문장 바로 옆에 붙었다. 두 문장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연결선이 생겼다.
도윤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때의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만큼만 했겠지.”
“그게..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면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걸 지금이라도 인정하는 게, 아무것도 아님의 반대편이야.”
“그게 책임인가요?”
할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대신 미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책임은 벌이 아니고, 방향이지.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것도 방향이고.”
나는 테이블 모서리에 앉아 그 말을 삼켰다.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것에도 방향이 있다니. 고양이인 나에게는 꽤 어려운 문장이었다. 우리는 보통 움직임 속에서만 방향을 느끼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가만히 서서도 아주 먼 곳까지 마음을 보낸다. 그 마음이 돌아오지 못하면, 어디선가 자꾸만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벽을 천천히 훑었다. 그러곤 펜을 들고 한 줄을 적었다.
'나는 증언하지 않았다.'
글씨가 단단했다. 그는 붙여진 종이들을 오래 보았다. 마치 자기 문장이 어디에 붙을지, 자리를 찾는 듯이. 결국 그는 가장 아래, 구석에 붙였다.
"여긴… 덜 보이는 자리네요." 수연이 말했다.
"그래서요. 그러면 안 되나요?" 그는 짧게 덧붙였다.
"덜 보이고 싶어서요."
미묘한 공기가 생겼다. 어떤 문장은 붙이는 순간 방의 모양을 바꾼다. 방이 갑자기 좁아지거나, 아주 멀어지거나. 이번 문장은 천장을 조금 낮췄다. 숨을 길게 쉬면 머리가 닿을 것처럼.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어둠이 아니라, 과도한 빛이 있었다. 너무 밝아서, 도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종류의 빛. 그 속에서 나는 순간적인 깜박임을 보았다. 운동장, 방송실, 하얀색 구두. 그리고 '그때 내가 입을 열었다면' 하고 입술 안쪽에서 무수히 부서지는 문장들.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의 당신을 용서하라고." 하지만 나는 한 번 이미 대가를 치렀다. 오늘은 조용히 혀를 말아 넣었다. 대신 꼬리로 바닥을 한 번, 두 번, 세 번 긋고 멈췄다.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신호였다. 말하지 말 것. 대신 볼 것.
비가 약해졌다. 카페 안에 앉은 시간들은 무게를 교환하는 법을 배우는 중 같았다. 누군가는 조금 덜 무거워졌고, 누군가는 조금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무게가 생긴다는 건 잡을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잡을 수 있으면, 옮길 수도 있으니까.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저녁의 푸른빛이 유리 안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오빠, 오늘 문장들… 이상하게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어요? 다들 '봤지만'으로 시작하네요." 수연이 조용히 물었다.
"그럴 때가 있지. 세상이 같은 말로 말을 걸어올 때가 있어." 도윤이 벽 앞에 섰다.
"왜 하필 오늘일까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 그 문장 두 개 사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내가 본 것을 잊을 수 있을까요?'와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사이. 그의 손가락이 잠깐 떨렸다. 아주 잠깐.
할아버지가 컵을 포개다가 말했다.
"사람은 자신이 외면한 것을 잊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걸 기억함으로써 살아남지."
"기억이 벌이라면요?" 수연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니. 기억은 나침반이란다. 벌은 방향을 잃을 때 오는 거고."
나는 할아버지의 발 밑에 누워 골골송을 켰다. 인간이 말하는 방향과 고양이가 느끼는 방향은 다르지만, 둘 다 마음의 이동이라는 점은 같았다. 오늘은 모두가 조금씩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보았지만'의 방향.
불을 끄기 전에, 도윤은 벽에서 한 장을 떼어 내 서랍에 넣었다. 수연은 묻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에, 비가 아주 멀리서 다시 시작되는 소리가 섞였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소리보다 그림자를 더 정확히 듣고 있었으니까.
카페를 정리하고 나면, 집으로 가기 전에 도윤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자세로 잠시 쉬며 책을 읽는다. 그러다 잠드는 날도 있다. 오늘은 달랐다. 그는 책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빈 머그컵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마치 따뜻함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미라야. 사람들에게는 그런 날이 있어. 유난히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날 말이야. 혹시 너, 그 이유를 알아?"
"그날의 귓속이 그렇게 생겨서."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그냥 순발력으로 답한다.
"귓속?"
"응. 귓속과 눈속은 연결되어 있거든. 오늘은 '보았지만'이 잘 들리는 날이었나 보지."
그는 웃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고급진 유머를 쓴 모양이다. 대신 내 유머를 애써 이해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혹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주저하던 고백의 말을 꺼내 듯 조심스레 묻는다.
"오늘은 묻는 사람이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궁리하다 대답했다.
새벽은 대개 푸른색보다는 깊은 회색에 가까웠다. 프러시안 블루가 창틀에 걸려 얇게 마르고, 그 위에 연한 회색이 겹겹이 올라앉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꼬리를 말았다. 도윤의 숨이 길어졌다 짧아졌다를 반복했다. 꿈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꿈이 시작될 때 나는 보통 먼저 냄새를 맡는다. 오늘은 냄새가 아니었다. 정적이었다. 소리를 뺀 뒤에 남는 소리. 그 안에서 누군가가 아주 작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보았지만... 보았지만...’
도윤의 손이 컵을 놓치는 듯 허공을 더듬었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 올라 그의 손등을 발바닥으로 눌렀다. 이럴 때의 체온은 인간에게도 고양이에게도 최선의 약이다. 그는 아주 약하게 손가락을 오므렸다. 마치 내 발을 잡으려는 듯이.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는 듯이.
풍경이 아주 작게 울렸다. 문은 닫혀 있었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은, 들어오지 않는 울림도 있다. 그 울림은 안쪽에서 시작된다. 나는 눈을 감고, 오늘 벽에 붙은 두 문장을 마음속으로 나란히 붙였다.
‘내가 본 것을 잊을 수 있을까요.
보았지만,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나 자신의 문장을 하나 적었다.
'보았으니, 이제 본다.'
카페는 고요했고, 밤은 더 느리게 흘렀다. 꿈의 문지방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