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두 모녀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내가 민혁에게서 보았던 장면들을 모두 전해 들은 후에.
“민혁이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나눠도 괜찮을까요?” 도윤이 답게 자세를 낮추고 공손하게 물었다. 여전히 민혁의 엄마는 가시지 않은 화로 인해 오리입이 되어 굳어 있다. 할머니의 괜찮다는 말에 도윤이 말을 잇는다.
"민혁이는, 집에서 어때요? 잘 웃나요?"
그 질문에 민혁의 엄마가 잠시 말을 잃었다.
"웃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왠지 허를 찔린 듯 답했다.
“웃는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죠. 신뢰의 문제가 아닐까요? 진정한 미소는 무방비 상태에서 나오거든요. 상대에 대한 불안함이 없는 편안함 속에서요.”
짧은 정적. 나는 그 순간, 도윤의 눈 속에서 미세한 파동을 보았다. 누군가를 지켜보던 소년의 눈빛. 그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달랐다. 그는 처음으로 말을 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감싸기 위해서.
“저는 도윤이를 믿어요. 의대에 합격도 하고 의사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 후에는 민혁이 원하는 길을 가기도 할 테고요. 물론 그것을 지금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주라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결국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자 하는 것만 믿는 것이니까요? 제가 지금 어떤 진실을 확실한 미래를 말씀드린다고 해도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두 분의 몫입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바람에 쉽게 휘둘리는 갈대숲의 소리가 아닌 꼿꼿한 대나무 숲의 소리였다. 어린 녀석이 어른을 가르치려 든다고 역정을 낼까 내심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민혁의 엄마와는 달리 교양 있는 할머니 덕분이었다. 아휴.. 모녀가 달라도 어찌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민혁이가 엄마를 닮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민혁의 엄마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할머니가 마음을 전하 듯 조용히 딸의 손위에 당신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그만하자. 저분 말이 맞기를 바란다. 아니 틀린다고 해도 나는 민혁이를 믿는다. 핏줄도 아닌 남도 믿는데 내 자식을 못 믿어서야 되겠니? 너나 나나 모두 민혁이 웃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되었구나. 웃어야 숨도 쉬지 않겠니."
"어머니, 저는..."
"네 마음 모르지 않는다. 나도 손주 대학 붙는 게 좋지. 모두가 부러워하는 의사도 되고. 하지만 인생이 정해진 틀 안에만 있으면 숨 막히지 않겠니?"
할머니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오래된 '쓰라림'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가두어 놓았던 시간들일 것이다.
할머니가 그만 가봐야겠다고 일어서는 순간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전에는 계단을 오르시느라 가쁜 숨을 내쉬던 분이 오늘은 가벼운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일부러 천천히 오신 게 아닌가 싶다. 카페 현관 앞에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으셨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뵙네요. 손주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생김새도 그렇지만 마음 씀씀이가 꼭 빼닮았네요.” 들어오시는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하하 그런가요. 저보다는 나아야죠. 그나저나 따님이나 손주에게 폐를 끼쳐 죄송했는데... 다시 앉으시죠. 민혁이 사주 봐드릴게요.” 할아버지도 능글맞은 구석이 있다. 분명 밖에서 지켜보다가 들어온 것이다.
“아니에요. 이미 손주가 다 풀어 주었어요. 이제 사주도 카페도 손주에게 맞기 셔도 될 만큼 잘 키우셨네요. 쉽지 않으셨을 텐데. 예전에 비해 한결 가벼워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또 뵙죠.”하며 아쉬운 듯 카페 문을 나섰다.
민혁의 엄마와 할머니가 나가자, 카페는 다시 조용해졌다. 유리창 너머로 오후 햇살이 천천히 기울었다. 도윤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나, 잘했나?" 수연을 보고 말했지만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목소리였다.
"응. 그런데 나는 할머니 말이 조금 더 와닿네.” 수연이 웃으며 답했다.
"그건 인정." 도윤도 함께 웃었다.
옛 일을 회상하시던 할아버지가 한 말씀 거드신다.
"사람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니라, 이기면 안 되는 싸움이 있단다."
"오늘 이 상황은 어떤 싸움이었을까요?"
도윤이 묻는다.
"도망치지 않은 싸움."
그 말이 공기 중에 오래 떠 있었다.
밤이 되자, 도윤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옆으로 올라가 앞발로 그의 팔을 두드렸다.
"왜 이렇게 조용해?"
"오늘… 이상했어. 마치 누가 나 대신 말을 해준 것 같았어."
"그게 바로 네가 본 거야."
"본 거?"
"응. 누군가의 눈 속에서 너를 본 거."
"오늘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를 지켜봤다는 느낌이 있었어." 도윤은 그 느낌을 감각을 다시 안고 싶은 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게 공감이야."
"공감?"
"응.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나오니까."
“공감은… 보는 일이다.” 그는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
"그래. 제대로 보는 일. 마음을 담아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라, 그럼 넌 날 어떻게 봐?"
"아직은… 초점이 맞지 않는 얼굴."
"그럼, 언젠가 초점이 맞을까?" 그는 웃었다.
"그건 네가 어디까지 보려 하느냐에 달렸지."
새벽녘, 풍경이 한 번 울렸다. 나는 도윤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었다. 오늘의 공기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오랜 시간 동안 닫혀 있던 문을 아주 조금 밀어 올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