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비가 내렸다. 밤과 새벽의 경계에 들어 선 공기에는 젖은 흙과 먼지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창가에 앉은 나는 도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손끝에는 펜 자국이 묻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반쯤 접힌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괜찮아요, 그 말이 답장이에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도윤은 벽의 글을 자주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에서 어떤 길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미안하다’에서 ‘괜찮다’로 옮겨가기까지는.
그날 밤,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의 잠을 지켜보았다. 그의 가슴 위가 고요하게 오르내리다가, 어느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이 열리지 않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꾸는 꿈의 냄새를 맡았다. 꿈에도 냄새가 있다. 어떤 것은 풀잎처럼 연하고, 어떤 것은 오래된 종이처럼 눅눅하다. 오늘 도윤의 꿈은 잉크 냄새가 났다. 잊히지 않은 문장의 잔향, 혹은 아직 쓰지 못한 편지의 냄새.
꿈속에서 나는 카페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불빛이 꺼진 공간에 종이 울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바람만이 테이블 위의 메모지를 흩날렸다. 벽에 붙은 글귀들이 허공을 돌아다녔다.
‘내가 아빠라서 미안하다.’
‘나는 내 선택을 믿을 수 있을까?’
‘정답은 몰라도 괜찮아요.’
그 글들이 서로 겹쳐지며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냈다.
“보고도 말하지 못한 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 문장이 허공에서 빛처럼 흔들렸다. 도윤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글자들은 손끝에서 녹아 사라졌다. 그때였다. 창가 쪽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긴 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었고, 희 셔츠의 팔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는 하얀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도윤이 묻지 않아도, 나는 그의 마음속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펜을 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 글씨는 흐릿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나를 기억해야 해.’
그 순간, 공기가 무겁게 흔들렸다. 나는 냄새를 맡았다. 피와 분필, 그리고 비의 냄새. 그 냄새 속에 숨어 있던 오래된 장면 하나가 번쩍이는 것도 보았다.
좁은 복도, 파란 교복, 구석에 웅크린 어깨. 누군가의 웃음소리, 누군가의 외면. 그 장면 속에서 도윤은 멈춰 서 있었다.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한 아이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누군가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그가 잊어버린 이름이라는 것을.
“그만해...”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꿈은 멈추지 않았다.
소녀가 도윤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너는 나를 봤잖아.”
나는 그 옆에서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흐려졌다. 나는 알았다. 그는 이 장면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단지, 잊어버렸을 뿐이다. 기억이란 종종 너무 무겁거나, 너무 부끄러워서 스스로 봉인해 버리니까.
“미라... 멈춰줘.”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떨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나의 역할은 보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나만이 아니라 그도 끝가지 봐야 했다.
늦은 새벽이 버티고 있을 즈음,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발치로 다가가 앉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 소녀가... 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창가로 걸어가 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젯밤에 없던 문장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가 쓴 듯, 그러나 아무도 쓰지 않은 글.
‘편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글씨 끝에 작은 커피 자국이 묻어 있었다. 아마 내 발자국일 것이다. 그 흔적이 마치 도윤의 꿈에서 현실로 새어 나온 듯했다.
아침 햇살이 카페를 채웠다. 도윤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 낮고 거칠었다.
“미라, 나도 언젠가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조용히 그 곁에 앉아 꼬리를 감았다.
“언젠가 받게 될 거야. 하지만 먼저, 서야 해.”
“누구에게?”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너 자신에게.”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벽의 문장 위로 흘렀다.
‘괜찮아요, 그 말이 답장이에요.’ 그 밑에서 새로운 문장이 반짝였다.
‘편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두 문장은 타인을 행한 위로와 자신에게 남긴 약속이었다.
나는 그 둘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카페의 공기가 처음으로 따뜻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꿈이 현실에 닿아, 조금씩 생명력을 되찾는 듯했다.
창밖의 하늘이 밝아왔다. 나는 도윤의 곁에 앉아 중얼거렸다.
“답장은 언제나 늦게 도착해. 하지만 늦는다는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그 편지는 언젠가 도착할 것이다. 도윤이 스스로의 기억을 직시할 준비가 되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