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비가 그치고 나면 세상이 조금 더 투명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사람의 마음속도 함께 드러난다. 도윤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문 쪽을 바라보며, 커피잔을 들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벽에 붙은 문장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종이를 흔들었다.
"나는 그때,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장이 오늘따라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발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그의 무릎에서 떨어진 시선이 바닥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의 이름 때문일 것이다.
'미라.‘
그 이름이 그의 안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깨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척하려고 해도 이름은 결국 제 주인을 찾아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 오후,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카페 창고 문을 열었다.
그곳은 비품들과 오래된 할아버지가 철학관을 정리하며 가져온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시간에도 향기가 난다면 이런 걸까.
그 향은 낡았지만, 나에겐 익숙했다. 그 냄새엔 인간의 후회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 열었다 완전히 닫지 못한 작은 상자가 도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안에는 닳은 가죽 표지의 노트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도윤은 맨 위의 노트를 들어 조심스레 표지를 열었다.
첫 장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철학관 상담일지. 기록은 기억의 또 다른 형태다.
사람은 신의 뜻을 묻는다.
그러나 신의 뜻이란 결국 인간의 선택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공기 속에서 미묘한 온도를 느꼈다. 그것은 냉기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온도였다.
인간의 후회는 따뜻하다. 그래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손이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나는 선반 위로 올라가 그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사람들은 자기 기억을 숨길 때 가장 단정한 글씨를 쓴다.
할아버지의 글씨는 정직할 만큼 반듯했다.
“오늘, 도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엔 아무 일도 아니라 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 아이의 눈 속에서 '증언하지 않은 자의 죄'를 보았다.
‘한 아이가 괴롭힘을 당했어요.
난 그걸 봤어요. 하지만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미라.
얘는 그 이름을 말할 때 손을 떨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 이름을 읽는 순간,
몸 안 어딘가가 얼어붙었다.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내 이름이, 종이 위에서 나를 불렀다.
도윤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때 그의 입에서 아주 낮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정말 내가 그걸 얘기했었구나."
그는 다음 장을 넘겼다.
할아버지의 글씨는 점점 흐려지고, 문장에는 조심스러운 흔적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큰 두려움이 있었다.
도윤이 다치면 어쩌나, 그 일이 번지면 어쩌나.
아직 여린 이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 고통을 견뎌 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잊어라. 시간은 언젠가 너를 용서할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다."
글씨 옆에는 작게 덧붙은 문장이 있었다.
"그 말이 이 아이의 기억을 지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인간의 후회는 냄새가 난다.
낡은 잉크 냄새처럼, 오래돼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
진실을 외면한 인간의 향. 그 냄새가 방 안 가득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무겁고 따뜻했다. 누군가를 지키려다, 결국 더 짙은 어둠을 품게 된 사람의 회한이었다.
도윤은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 손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알고 있었구나. 결국... 나랑 같았네."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닿은 듯 흔들렸다.
분노도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이해에 가까운 슬픔이었다.
"그때,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결국엔… 우리 둘 다 숨은 거야."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비쳤다.
'도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복도에 서 있던 모습,
말하지 못했던 그 순간의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때, 노트의 마지막 장 한 귀퉁이에 삐져나온 종잇조각이 보였다.
나는 앞발로 살짝 건드렸다.
종이는 쉽게 떨어졌다.
거기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철학은 신의 언어를 인간의 고백으로 바꾸는 일이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점(占)’을 통해 신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실을 덮은 순간부터,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철학관을 닫고 카페 카뮈를 연 이유. 그것은 속죄였고 동시에 다시 말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렇다. 할아버지에게 카페 카뮈는 속죄의 장소였다.
누군가의 죄책이, 누군가의 용서가, 커피 향처럼 섞여 있는 곳.
도윤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방 안의 공기와 싸우는 사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의 발에 몸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너를 사랑했어.”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알아. 사랑은 때로 진실을 덮는 이름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바뀌었나 봐. 그 일 덮고, 점집도 접고, 나한테 커피를 배우자고 했었거든.”
사람의 사랑이란 참 모순된 것이어서, 그 안에는 늘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지키려는 마음과 외면하려는 두려움.
그는 작게 웃었다.
"그때부터였어. '진실보다 따뜻한 게 있구나' 하고 생각한 게."
나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따뜻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 온기가,
가려야 했던 진실을 더 깊이 묻어버리기도 하니까.
상자 위 노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진실은 덮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그건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눈을 통해 되살아나.'
나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 너머에서 햇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그 빛 속에서 먼지들이 떠올랐다.
그건 꼭, 잊혔던 기억의 파편들 같았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공중에 머무는 조각들.
도윤은 뒤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미라, 사람은 왜 이렇게 늦게야 용서를 배우는 걸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 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